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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호의 “물 좀”…그 순간 쏟아진 셔터 세례의 의미[청계천 옆 사진관]

동아일보 변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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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호의 “물 좀”…그 순간 쏟아진 셔터 세례의 의미[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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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 138
● 대장동 사건 1심 이후, 항소 포기와 ‘추징금 논란’이 검찰 내부 반발로 이어지다

대장동 사건 1심 재판에서는 일부 피고인들이 검찰 구형보다 더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국민적 관심은 판결 내용뿐 아니라 추징·몰수 범위가 충분히 인정되지 않았다는 데에 집중되었습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10일 오전 경기 과천 정부과청청사 법무부에 출근하며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관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던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과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10일 오전 경기 과천 정부과청청사 법무부에 출근하며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관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던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과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 부분은 검찰 내부에서 “항소로 다퉈야 할 지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수사 검사들뿐만 아니라 검찰연구관들까지 판결문을 검토해 “항소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대검 지휘부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항소 마감 시한 직전, 검찰은 항소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난 7일 금요일의 일이었습니다. 이 결정 직후, 내부에서는 강한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서울중앙지검장이 사의를 표하는 등 조직 내부의 갈등은 공개적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전국 검사장들도 “항소 포기 경위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대검에 요구했습니다. 법무부-대검-중앙지검 사이에서 누가 어떤 판단을 했는지에 대한 해석도 엇갈렸고, 의사소통 과정 역시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0일 월요일 아침 정성호 법무 장관의 출근길 도어스테핑은 단순한 브리핑이 아니라, 정치적 부담을 한 몸에 받는 자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 도어스테핑은 포토스프레이와 다르다 - 긴 대화 속에서 장면이 생긴다

장관실은 도어스테핑 일정을 전날인 9일 일요일 공지했습니다. 월요일 영상·사진기자들은 아침부터 과천 청사 앞으로 모여 자리를 잡았습니다. 취재 관행은 단순합니다. 먼저 온 사람이 더 앞 중앙에 자리를 잡습니다. 취재 현장에서 말하는 포토스프레이(photo spray)는 카메라 셔터가 스프레이처럼 터지는 1~2분의 짧은 촬영 구간입니다. 최근 외교부 등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입니다. 기존에 있던 프로토콜인 포토세션(photo op)도 대부분 3~5분이면 끝납니다. 하지만 도어스테핑은 이 둘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날 장관은 20분 이상 카메라 앞에 서 있었습니다.

도어스테핑은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고, 답변에 이어 추가 질문이 꼬리를 물고, 답변 사이마다 잠시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는 과정이 있기도 합니다. 이 시간 동안 주인공의 표정 변화, 손의 움직임, 속사포 같은 답변과 두리뭉실한 답변 등 비언어적 장면이 드러납니다. 정치인의 말보다 말이 멈추는 순간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 “물 좀.” — 그날의 결정적 장면이 나온 순간

문답이 후반부에 들어섰을 때, 장관은 “7000억 환수 논란은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소리가 잠시 굳어졌고, 장관은 옆 보좌관에게 짧게 말했습니다.


“물 좀.”

화면 밖에서 손이 들어오면서 500ml 생수병이 전달되었습니다. 장관은 이를 한 모금 벌컥 들이켰습니다. 2초가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앞에 서 있던 사진기자들의 셔터가 일제히 열렸습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10일 오전 경기 과천시 법무부 청사로 출근길에서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 결정과 관련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는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2025.11.10. 뉴시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10일 오전 경기 과천시 법무부 청사로 출근길에서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 결정과 관련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는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2025.11.10. 뉴시스


짧은 포토스프레이였다면 결코 포착될 수 없는, 도어스테핑만이 만들어내는 비언어적 장면입니다. 한국 정치사진에서 정치인의 물 마시는 장면은 오래전부터 ‘속이 탄다’ ‘답답해 한다’ ‘압박을 받는다’ 는 은유로 읽혀왔습니다. 정성호 장관의 물 마시는 장면 역시 추징금 논란, 항소 포기 결정, 검찰 내부 반발, 정치적인 목적에 충실한 결정이라는 의혹 그리고 그 모든 시선을 받는 정치인 출신 관료가 갖는 부담이 응축된 장면이었습니다.


● 역대 정치인들의 ‘물 마시는 장면’은 무엇을 말해왔나

정치인의 물 마시는 장면이 처음부터 ‘긴장’의 상징은 아니었습니다. 1967년 박정희 후보의 물 마시는 모습은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장면에 가까웠습니다. 물을 마시면서 웃고 있는 장면입니다.

제 6대 대통령 선거 하루 앞둔 박정희 후보. 1967년 5월 2일. 동아일보 DB

제 6대 대통령 선거 하루 앞둔 박정희 후보. 1967년 5월 2일. 동아일보 DB


그러나 1988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는 기업인·전직 권력자들이 의원들의 추궁을 견디며 물을 들이켰고, 이후 이 장면은 “압박과 곤혹스러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국회 5공비리특위 일해재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안현태 전 청와대경호실장. 1988년 11월 8일. 동아일보 DB.

국회 5공비리특위 일해재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안현태 전 청와대경호실장. 1988년 11월 8일. 동아일보 DB.


국회 5공비리특위의 일해재단 관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1988년 11월 7일 동아일보 DB

국회 5공비리특위의 일해재단 관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1988년 11월 7일 동아일보 DB


국회 5공비리특위 일해재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1988년 11월 9일 동아일보 DB

국회 5공비리특위 일해재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1988년 11월 9일 동아일보 DB


1998년 북풍 기획 의혹으로 검찰 출두 요구를 받은 정형근 의원이 회의 도중 물을 마시는 장면은 정치적 곤궁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순간인데 당시 신문은 이 사진의 제목으로 “갈증 나네요”를 붙였습니다.


“갈증나네요” 북풍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출두요구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이 9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홍석희기자. 1998년 3월 10일. 동아일보 DB

“갈증나네요” 북풍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출두요구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이 9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홍석희기자. 1998년 3월 10일. 동아일보 DB


이후 정치인의 물 마시는 장면은 정치적 부담감과 긴장을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말보다 먼저 말하는 이미지 — 사진이 남기는 기록의 역할

정치에서 많은 결정은 말로 이루어지지만, 그 말의 기록은 종종 남지 않습니다. 이번 항소 포기 과정에서도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어떤 의견이 전달되었는지, 국민이 확인할 수 있는 문서는 없습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10일 오전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출입구에서 최근 검찰이 대장동 개발비리 의혹 사건 1심 선고에 대한 항소를 포기한 것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25.11.10/뉴스1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10일 오전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출입구에서 최근 검찰이 대장동 개발비리 의혹 사건 1심 선고에 대한 항소를 포기한 것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25.11.10/뉴스1 


사진은 말이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순간의 공기와 긴장을 기록합니다.

침묵과 표정과 몸짓이 말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언제나 말과 말 사이, 정치인의 무의식이 스치듯 드러나는 찰나를 기다립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그 짧은 침묵과 한 모금의 물에서 정치가 어떻게 이미지로 남고, 이미지가 어떻게 기록으로 축적되는지를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신가요? 여러분의 생각을 좋은 댓글로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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