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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하다 62세 때 29세 비서와 결혼… 야세르 아라파트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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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하다 62세 때 29세 비서와 결혼… 야세르 아라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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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04년 11월 11일 75세
야세르 아라파트. 199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야세르 아라파트. 199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는 생애 후반 35년간 국제 뉴스를 몰고다녔다. 1959년 무장 게릴라 단체 파타를 창립한 아라파트는 1969년부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이끌었다. 이 기간 ‘아라파트 누구인가’ 같은 인물 기사가 조선일보에 최소 7회 실렸다.

1988년 11월 팔레스타인이 독립국을 선포했을 때도 별도 기사로 그를 조명했다. 제목은 ‘팔레스타인과 결혼한 59세 총각’이었다.

팔레스타인 독립국 선포. 1988년 11월 16일자 5면.

팔레스타인 독립국 선포. 1988년 11월 16일자 5면.


“아라파트는 지난 20여 년 동안 그를 제거하거나 또는 조종하려는 이스라엘 군이나 아랍국 정부들과의 싸움을 헤치고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이끌어왔다. 총각인 그는 “나는 팔레스타인과 결혼했다”고 말하고 있다.”(1988년 11월 16일 자 5면)

아라파트는 62세 때인 1991년 29세 비서인 수하와 결혼해 ‘총각’에서 벗어났다.

초기엔 강경 무장 투쟁을 벌였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PLO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랍국과도 결전을 불사했다. PLO는 1970년 요르단과 군사 대결을 벌이고 이후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겼다. 1972년 산하 과격 단체 ‘검은 9월단’은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단 2명을 살해하고 9명을 인질로 잡았다. 서독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인질이 모두 죽고 테러범 5명도 사살됐다.

아라파트 누구인가. 1974년 11월 3일자 3면.

아라파트 누구인가. 1974년 11월 3일자 3면.


아라파트는 이후 국제 테러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74년 11월 유엔총회에 처음으로 참석해 “나는 항상 권총과 올리브나무를 함께 들고 있다. 내 손에서 올리브 나뭇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연설했다. PLO는 유엔에서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합법 조직으로 인정받았다. 서방에서는 “앞에서는 평화를 말하고 뒤에서는 테러를 사주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1993년 9월 13일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는 이스라엘과 미 워싱턴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를 인정하는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이날 양측이 서명한 평화 협정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 시(市)와 가자지구에 대한 제한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원칙, 이스라엘과 PLO의 상호 실체 승인 등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1993년 9월 14일 자 1면)

1993년 9월 14일자 6면.

1993년 9월 14일자 6면.


아라파트는 1994년 중동 분쟁을 마감할 기초를 마련한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공동 수상이었다. 1996년 1월엔 팔레스타인 자치 선거에서 88% 득표로 자치정부 초대 행정수반에 당선됐다.


평화는 기대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평화 협정에 서명했던 이스라엘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에서 과격파 유대인 청년이 쏜 총탄에 사망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강경 투쟁을 주도하는 무장 단체 하마스가 힘을 얻었다. 팔레스타인 국민을 상대로 한 1998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65%는 아라파트가 이끄는 자치정부가 부패했다고 답했다.

아라파트는 2001년 12월부터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수도 격인 라말라에 있는 청사에서 말년까지 갇혀 지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공격해 자치권을 박탈했고 아라파트를 청사에 연금했다.

아라파트 사망 공식 발표. 2004년 11월 12일자 A20면.

아라파트 사망 공식 발표. 2004년 11월 12일자 A20면.


아라파트가 사망했을 때 조선일보 칼럼 ‘만물상’은 그를 논쟁적 인물로 평가했다.


“‘사막의 불사조’ ‘오뚝이’로 불리던 아라파트가 마침내 이승의 삶을 마감했다. 아라파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한 영웅으로 평가받는가 하면 테러리즘의 대부라는 딱지를 평생 안고 살아야 했다. 말년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2004년 11월 12일 자 A34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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