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가운데), 오기형 코스피5000특위위원장(맨 왼쪽), 강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27일 서울 영등포구 KRX 한국거래소 서울사무소에서 열린 코스피 사상 최초 4000 돌파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코스피 지수가 6월 이후 거침없이 올라 4천 포인트를 넘나드는 데는 인공지능(AI) 투자 열기와 함께 상법 개정으로 한국기업 저평가(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하지만 법을 고친다고 방만한 경영과 지배주주의 전횡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주주의 권리와 위탁 받은 자금의 힘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사업 구조조정을 하는 것이 행동주의 펀드와 사모펀드이다. 자본시장의 ‘메기’이자 구조조정의 ‘동반자’인 것이다. 하지만 사모펀드가 인수한 홈플러스 사태 이후 규제법안이 잇따라 발의되는 등 사모펀드와 행동주의 펀드는 궁지에 몰렸다. 이들이 힘을 발휘할 판이 깔렸는데, 손발이 묶일 역설적 상황이 됐다. 현재 상황을 살펴보고 제대로 된 펀드 규제 및 진흥 방향을 두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
지난해 4월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대회의실에서 당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기업과 주주행동주의의 상생·발전을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
상반기에 방영된 티브이엔(tvN)의 드라마 ‘미지의 서울’은 전직 자산운용사 임원 한세진(류경수)을 통해 주주 행동주의를 묘사했다. 기업경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소액주주를 설득해 주주총회 위임장 대결을 하는 모습은 드라마 소재로 나올 만큼 이제 자연스러워졌다. 그간 행동주의 펀드는 외국계의 전유물이었다. 2003년 SK(주)를 공략한 소버린 부터 2018년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에 개입한 엘리엇 펀드 등이 예이다. 하지만 2018년 강성부 펀드로 알려진 케이씨지아이(KCGI)가 한진칼 경영권 분쟁에 개입한 것을 전후해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성장이 눈에 띈다. 트러스톤과 얼라인파트너스는 각각 태광산업과 제이비금융지주에 대한 행동주의를 3년 이상 이어오며 이사회에 진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2004년 말 제도화돼 20년을 넘긴 사모펀드의 성장도 괄목할만하다. 2024년 말 현재 사모펀드는 1137개, 약정액은 153조6천억원이다. 5년 전인 2019년 84조3천억원에서 매년 약정액이 꾸준히 증가한 것이다. 이들은 주업은 기업의 사업구조조정에 파트너 역할을 하는 것인데 최근에는 지배구조 개선에도 개입하는 등 행동주의 영역에도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성장할 수록 역풍도 거세졌다. 특히 올해 행동주의와 사모펀드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재계가 상법 개정의 대안으로 행동주의 펀드 규제 장치를 요구하는 데다, 홈플러스 사태를 계기로 행동주의와 사모펀드 자체를 이단시하는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원래 한국에서 행동주의와 사모펀드에 대한 인식은 썩 좋은 것이 아니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계 사모펀드나 행동주의 펀드의 ‘먹튀’ 행태가 부각되면서, 이들에게는 ‘약탈적 기업사냥꾼’ 이란 이미지가 들씌였다. 론스타가 극동건설을 인수해 껍데기만 남기고 되팔았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막 발돋움하던 행동주의 펀드가 위축되는 모습도 보인다. 토종 행동주의 펀드의 가능성을 보여준 케이씨지아이 강성부 대표는 요즘 더 이상 행동주의 전략을 쓰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종합금융사로 커가고자 하는데 펀드에 돈을 대는 대형 투자자(LP)가 ‘시끄럽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 탓일 거란 추측이다. 한 중견 자산운용사 부사장은 “국내 주요 금융회사는 죄다 대기업 계열사이어서 행동주의 펀드는 이들과 척을 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모펀드 역시 노동자 해고나 자산매각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커 인수기업의 구조조정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행동주의 펀드 활동 역사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
이런 가운데 한국상장사협의회는 지난달 ‘약탈적 매수’ 방지를 위한 공시제도 강화 등 4대 정책과제를 제시하며 자본시장법 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최근 “주요 경영 사안에서 대주주 의결권이 3%로 제한돼 있어 투기세력에 의한 경영권 위협 가능성이 커” 졌다며 하반기에 상법을 개정해 복수의결권과 포이즌 필(신주인수선택권)을 지배주주에게 부여할 것을 요구했다.
사모펀드에 대해서도 펀드가 차입인수, 자산매각, 배당 등에 대해 금융위원회에 보고토록 하고, 투자한 기업이 어려워지면 금감위가 시정을 요구하고 펀드해산까지 명령할 수 있게 하는 안(김남근 민주당 의원), 차입인수(LBO)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차입 한도를 순 자산의 400%에서 200%로 축소하는 안(김현정 민주당 의원), 사모펀드가 취득한 지분을 5년 이상 의무적으로 보유하도록 하는 안(장혜경 진보당 의원) 등이 올라와 있다.
그런데 이런 규제안은 특수한 사례에서 불거진 부정적 여론에 부응해 금융시스템의 전체적 정합성을 고려하지 않고 내놓은 측면이 있다. 자칫 ‘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일’ 위험이 있는 것이다. 행동주의나 사모펀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도 많다. 지난해 말 자본시장연구원 박용린 부원장이 사모펀드 도입 20년을 맞아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사모펀드가 투자한 기업의 가치는 평균 35% 높아졌다. 펀드가 기업을 보유한 기간은 평균 3년 10개월인데 이 기간에 기업가치가 의미 있게 상승했다는 평가이다. 행동주의 펀드에 대해서도 김우찬 고려대(경영학) 교수는 “위임장 대결과 소송으로 경쟁력이 훼손되며, 장기적으로 기업가치와 수익성이 악화한다는 등 행동주의에 대한 여러 오해는 국내외 학계에서 실증데이터 연구를 통해 부정됐다”고 말했다. 실제 경영을 잘하고 지배구조가 제대로 된 회사에 행동주의 펀드가 들어가 위협하는 일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이런 규제 움직임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한국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고 성장 동력을 마련하고자 하는 이재명 정부의 정책 방향과 엇박자일 수 있다. 경영의 비효율성과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깨는 데는 법 규정 정비 뿐 아니라 시장의 힘이 작용해야 한다. 기업이 혼자 실현하지 못하는 가치를 끌어올리는 전문가로서 행동주의와 사모펀드의 역할이 필요하다. 원승연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명지대 교수)은 “주식시장에서 한국기업의 저평가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낮은 게 주원인인데, 그만큼 불필요한 자산과 자본이 기업 내부에 남아 있”다는 뜻이라며 이를 새 사업기회에 투자하거나 주주에게 환원토록 하는데 행동주의 펀드의 전략이 유효하다고 말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근래 일부 대기업에서 계열사가 늘고 차입금이 급증하고 있는데 일본이 했듯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며 “사업구조조정을 하려면 사모펀드가 정리하는 회사를 받아줘야 하는데 자칫 외국계의 독무대가 될 수 있다” 고 말했다.
물론 행동주의와 사모펀드의 활동이 역기능을 낳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단기주의(shortermism)에 매몰될 경우 인수기업의 단기실적은 개선될지 모르지만, 중장기 성장동력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상장사인 한온시스템과 한샘은 사모펀드 인수 후 주가가 줄곧 내려가 주주들의 원성을 샀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배당확대 등 단순한 주주환원을 넘어 기업의 장기 활력과 성장 가능성을 높이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주주관여 투자가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려면 펀드에 돈을 대는 ‘큰손’인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이 투자 수익뿐 아니라 그로 인한 고용, 납품업체까지 고려하는 책임투자 원칙을 운용사(GP)에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국민연금은 행동주의 펀드에도 일정 부분 자금을 위탁해 이들의 활동을 지원한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불리는데 그런 전략도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행동주의와 사모펀드의 순기능을 살리고 역기능을 제어하려면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시장이 할 일과 법규로 할 일의 갈래를 잘 타야 한다. 하편에서는 두 전문가의 좌담으로 규제의 방향을 점검한다.
용어 풀이
△ 사모펀드: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적으로 자금을 모으는 공모펀드와 달리 연·기금, 거액 자산가 등 제한된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받아 운용하는 펀드를 말한다. 공모에 비해 규제가 느슨하다. 주식, 외환 등 유동성이 큰 자산에 투자하는 헤지펀드와 기업의 지배권을 인수해 3∼10년 경영을 해 가치를 높여 파는 바이아웃펀드로 구분한다.
△ 행동주의 펀드: 주주가 경영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주주 행동주의라 한다. 주주제안, 공개매수, 위임장 대결 등이 주된 전략인데 이를 통해 지배구조 재선이나 사업구조 개선을 이뤄내 투자 지분의 가치를 높이는 걸 노리는 펀드를 말한다. 헤지펀드가 주종을 이루지만 바이아웃펀드도 이런 전략을 종종 쓴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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