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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건보공단 '6천억 잔치' 청구서, 왜 막내가 독박 쓰나

연합뉴스 서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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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건보공단 '6천억 잔치' 청구서, 왜 막내가 독박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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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파티' 헤드라인 뒤에 가려진 '저임금의 늪'
떠난 선배들이 차린 잔치, 남은 후배들이 설거지하는 격
국민건강보험공단[연합뉴스TV 제공]

국민건강보험공단
[연합뉴스TV 제공]



(서울=연합뉴스) 서한기 기자 = "국민 혈세로 6천억 잔치라니!"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의 인건비 과다 편성 뉴스를 접한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뜨겁다. 8년간 무려 6천억 원에 달하는 인건비를 부풀려 직원들끼리 나눠 가졌다는 국민권익위원회의 발표는 고물가에 허덕이며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는 국민들에게는 배신감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했다.

기자 역시 첫 소식을 접했을 때는 공공기관의 도덕적 해이에 분개했다. 하지만 20년 넘게 보건의료 현장을 지켜본 경험은 표면적인 숫자 너머의 '맥락'을 들여다보게 했다. 과연 이 사건은 탐욕스러운 공공기관 직원들의 파렴치한 '한탕'이었을까. 그 이면을 꼼꼼히 따져보니 마냥 돌을 던지기엔 복잡하고 씁쓸한 속사정이 드러났다.

우선 '6천억 원'이 만들어진 구조부터 살펴보자. 건보공단은 고위직(1∼4급) 정원은 많지만, 실제 현원은 적고, 하위직(5∼6급)은 정원보다 현원이 많은 기형적 인력 구조였다. 공단은 이를 이용해 예산을 짤 때 비싼 '스테이크(4급 임금)' 값을 청구해놓고, 실제로는 저렴한 '돈가스(5∼6급 임금)'를 먹었다. 그리고 남은 식비를 반납하지 않고 전 직원의 임금을 조금씩 올려주는 데 사용했다. 명백한 규정 위반이자 편법이다.

하지만 "왜 그랬는가"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건보공단은 밖에서 보는 '신의 직장' 이미지와 달리,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저임금에 시달려왔다. 2019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건보공단의 평균 임금은 전체 129개 공공기관 중 108위에 그쳤다.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는 국민연금공단이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보다도 턱없이 낮았다. 과거 재정 위기 시절 임금 동결과 구조조정을 감내했던 후유증이었다. 결국 이번 사태는 비정상적으로 낮은 임금을 현실화하기 위한 절박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던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사태의 해결 방식이다. 정부는 잘못 집행된 인건비를 환수하겠다며 향후 건보공단 예산 삭감을 예고했다. 여기서 심각한 모순이 발생한다. '임금 파티'의 주된 수혜자는 당시 고위직에 있던 베이비붐 세대들이다. 이들은 이미 두둑한 퇴직금을 챙겨 공단을 떠났다.


그런데 정작 삭감된 월급명세서를 받아야 하는 건, 당시 입사해 파티의 떡고물조차 제대로 맛보지 못한 2030 젊은 직원들이다. 공단 내부망에는 "선배들이 벌여놓은 잔치판의 설거지를 왜 우리가 독박 써야 하느냐"는 젊은 직원들의 절규가 터져 나오고 있다.

"내가 받지도 않은 돈을 평생에 걸쳐 갚아야 한다"는 억울함은 단순한 불평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잘못된 관행은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6천억 원의 편법 집행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의 구현'이라는 명분 아래 애꿎은 하위직 직원들만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불공정이다.


숫자에 매몰된 기계적인 환수 조치보다는 누가 실질적인 이득을 봤는지 따져 묻고 구조적인 저임금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지 고민하는 '정교한 해법'이 필요하다. 분노는 잠시 거두고, 이 웃지 못할 '슬픈 잔치'의 진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볼 때다.

sh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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