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16년 11월 8일 87세
2016년 11월 8일 87세
최갑석 예비역 소장 등 '50년도 현지 임관 동우회'. 왼쪽 넷째가 최갑석. 2016년 1월 6일자. |
예비역 육군 소장 최갑석(1929~2016)은 1947년 2월 군에 자원 입대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아직 출범하기도 전이었다. 앞서 국군의 모체가 된 국방 경비대가 창설됐다. 국방 경비대 2연대에 이등병으로 배속됐다.
배고픔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밥은 쌀이 20% 정도밖에 없는 보리밥이었다. 그마저 양이 항상 모자랐다. 반찬도 없었다. 콩나물국이나 배춧국에 밥을 말았다. 일본군이 쓰던 건물에서 생활했다. 깨진 유리창을 모포로 막고 한겨울 밤을 지샜다. 군복과 소총도 일본군이 쓰던 것이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국군이 정식 발족하면서 생활 여건은 다소 나아졌다. 군복은 미군 작업복을 개조해 썼고, 소총도 미제 M1과 카빈이 보급됐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일선에서 전투 지휘할 초급 장교가 절대 부족했다. 포병 부대 일등 상사였던 최갑석은 국방 장관 특명으로 소위로 현지 임관했다.(1998년 8월 11일 자 A4면)
최갑석 미담. 1957년 7월 10일자. |
최갑석은 1974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입대 27년 만이었다. 그동안 베트남전쟁에도 참전했다. 주월사령부 인사참모(대령)로 복무했다. 장군 진급은 자신이 포병 대대장(소령)일 때인 1955년 임관한 육사 11기보다 1년 늦었다. 1978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심판관, 제8보병사단장을 거쳐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끝으로 1983년 전역했다. 1986년 6월 25일 밤 KBS1 TV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해 ‘이등병 출신 장군의 37년 군인 일생’을 시청자에게 전했다.
2012년 5월 12일자 . |
전역 후 80대 나이에도 군 관련 활동을 계속했다. 최갑석은 83세 때인 2012년 5월 1일 고(故) 김한준 예비역 대위(사망 당시 83세) 장례를 육군장으로 하도록 주도했다. 고 김 대위는 6·25전쟁에서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었다. 그러나 육군장은 역대 참모총장을 역임한 장성, 장교로서 육군 발전에 특별한 공적을 남기고 전사·순직한 자,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전사한 자로 한정하고 있었다.
최갑석은 김상기 육군참모총장을 찾아가 “전사나 순직하지 못했다고 육군장에서 제외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설득했다. 육군은 회의를 거쳐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전사한 자’ 규정을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로 바꿨고, 이에 따라 고 김 대위의 장례는 위관급 장교로는 처음으로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최갑석은 당시 취재 기자에게 “6·25 때 함께 전장을 누비던 전우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게 안타까웠다”며 “육군장을 포함해 우리나라의 군 예우는 직위와 계급에 좌우됐던 적이 많았다. 지금이라도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처럼 실제 공훈 내용에 따라 예우가 진행되어야 한다” (2012년 5월 12일 자 A2면)고 했다.
별세 열 달 전인 2016년 1월 4일 최갑석은 ‘50년도 현지 임관 동우회’ 회원들과 함께 통일과나눔재단에 성금 244만원을 전달했다. 6·25전쟁 중 ‘현지 임관’한 회원들은 당시 26명이었다. 동우회 고문 최갑석은 “조국 수호와 국군 창군 등 나라를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소원은 통일뿐”이라며 “통일 나눔 운동이 새해에도 계속 확산됐으면 한다”(2016년 1월 6일 자 A31면)고 했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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