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탈출해 캄보디아 경찰서 갔더니” 영화처럼... 그놈들, 서장과 농담

범죄단지 가둔 뒤 “통장 만들라”
전기 고문 당해 양쪽 각막 손상

국경서 한국인 여성 숨진 채 발견

“사업 광고를 보고 갔는데 범죄 조직이었습니다. 두드려 맞고 고문당한 끝에 겨우 돌아왔지만 성한 곳이 없습니다.”

경남에서 자동차 부품 사업을 하는 20대 남성 A씨는 작년 하반기 사업차 캄보디아를 찾았다. 캄보디아 부품 업체에서 “부품을 값싸게 처분하려고 하니 협상하자”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편도 비행기 비용도 대주겠다고 했다.

캄보디아 프놈펜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중국인 1명과 캄보디아인 1명이 마중을 나왔다. 이들은 호텔로 가자며 검은색 승합차에 타자마자 표정이 바뀌었다. 중국인은 A씨 허벅지에 총구를 겨누며 “입 다물고 가만 있으라”고 했다.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원들이었다. 부품 업체 사이트는 위조된 사이트였다. 이들은 A씨를 범죄 단지에 가둔 뒤 “통장을 개설하라”고 했다. A씨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전기 충격기로 고문도 했다. A씨는 10여 일 만에 현지 교민들에게 구조됐다. 그러나 온몸에 화상 자국이 남았고, 양쪽 눈 각막이 손상돼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삼은 국제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이 ‘해외 취업’ ‘고소득 일자리’ 등을 내걸고 한국 MZ 세대를 유인하면서 한국 청년 피해가 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선 캄보디아 보이스피싱 조직이 허위 사업 광고까지 내며 한국 사업가까지 납치·감금·고문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한국인들에게서 뜯어낸 보이스피싱 수익을 해외로 빼돌리기 위해 한국인 명의 계좌를 대포 통장으로 쓰기 위해서다.

캄보디아 경찰이 10월 9일 프놈펜시 한 빌라에서 보이스피싱 사기조직을 급습해 18명의 용의자를 체포하고 있다./캄보디아 차이나 타임스 캡처

한편 캄보디아와 맞닿은 베트남 국경 지역에서 30대 한국인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여성의 시신은 부검을 마친 뒤 유족에게 인도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경찰은 이 여성이 현지 범죄 조직에 납치됐는지 등을 수사 중이다.

◇“겨우 탈출해 경찰서 갔더니, 놈들이 찾아와 총을 찬 채 서장과 농담”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3번 국도를 차로 50분쯤 달리다 샛길로 접어들자 푸른색 지붕의 빌라촌이 나타났다. 한 층에 22호(號)가 있는 4층짜리 빌라 10여 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중국 범죄 조직이 세계를 상대로 보이스피싱 사기 범행을 벌이는 본거지다.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인도네시아 등에서 유인한 4000여 명이 감금되다시피 머물며 보이스피싱에 동원된 캄보디아 최대 범죄 구역 ‘태자(太子) 단지’다.

15일 찾은 태자 단지 건물 대문 곳곳엔 한자 ‘복(福)’ 자가 뒤집혀 있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인적을 찾기 어려웠다. 최근 한국인 20대 대학생이 캄보디아 범죄 조직에 감금돼 고문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 알려져 파문이 커지면서 캄보디아 당국의 단속이 강화되자 범죄 조직원들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곳을 지나던 현지 주민은 “온라인 사기(Online Job)를 벌이던 사람들이 최근 컴퓨터와 사무기기를 차에 싣고 떠났다”고 했다.

본지가 이날 촬영을 시도하자 건물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들이 다가와 “사진을 찍지 말라(No Photo)”고 외쳤다. 기자와 동행한 한국 교민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경찰이 상주하고 있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교민 사회에선 “현지 경찰이 조직 뒷배를 봐주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돈다. 이날 만난 캄보디아 주민들도 “얼마 안 가 숨어 있던 두더지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등장해 범행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중국 소셜미디어에선 “경찰이 대규모 단속을 하니 숙소를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조직원들의 텔레그램 대화록과 함께 이들이 사무실 집기를 트럭으로 옮기는 사진도 올라왔다.

최근 캄보디아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납치, 감금, 살인 등 범죄가 늘어나며 당국의 단속이 심해지자 조직원들이 범죄 단지를 비우고 있다./중국 소셜미디어

자동차 부품을 구입하러 갔다가 범죄 조직에 붙잡혀 고문을 당한 한국인 A씨도 프놈펜 외곽 범죄 단지에 10여 일 동안 감금됐었다. 프놈펜 공항에 마중 나온 중국인 1명 등 2명이 안내한 차를 타고 이동한 지 40분쯤 지나자 하얀 건물이 밀집한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동하는 사이 이미 권총으로 협박당해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총칼을 두른 중국인 2명이 24시간 감시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번 중국 만두 7조각이 전부였다. A씨는 생수도 없어 누런빛이 도는 수돗물을 페트병에 받아 마셨다고 했다.

감금된 A씨에겐 협박과 폭행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조직원들은 그에게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라고 하라” “가족 명의로 통장을 개설한 뒤 캄보디아로 가져오게 하라”고 요구했다.

A씨는 10여 일을 감금돼 있다가 현지 교민과 캄보디아 주재 한국 대사관 도움으로 구조됐다. 그런데 프놈펜의 경찰서에 도착해 한국 대사관 직원을 기다리는데 자기를 납치했던 범죄 조직원들이 경찰서에 유유히 나타났다고 했다. A씨는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중국 조직원들이 총을 버젓이 차고 경찰서장과 농담하듯 웃으며 담배를 피웠다”며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고 했다.

캄보디아 당국과 한국 외교·수사 당국은 최근엔 범죄인 줄 알면서도 현지 조직에 가담했다가 감금·고문을 당한 한국 청년도 적잖다고 보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성격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다만 현지 교민들은 “캄보디아 조직의 가짜 광고를 믿고 온 피해자도 상당수”라고 했다. 제주도에 사는 20대 B씨는 지난 6월 ‘고수익 단기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고 캄보디아행 비행기를 탔다. B씨는 “2주 만에 5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광고를 믿었다”고 했다. 그는 전에도 해외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큰일이 있겠나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곳은 감금과 협박·고문이 일상인 ‘지옥’이었다.

15일 오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인근에 있는 ‘망고 단지’(왼쪽 사진). 보이스피싱 등 범죄 조직이 활동하는 본거지 중 한 곳이다. 현장 사진을 찍던 본지 기자를 단지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촬영하고 있다./박성원 기자

B씨가 캄보디아에 도착해 프놈펜 외곽 건물에 도착하자 제복 차림의 남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고 한다. 무장한 중국 범죄 조직원들이었다. 이들은 B씨에게 전기 충격기와 권총을 들이대며 통장 계좌 비밀번호를 요구했다. B씨는 “온갖 협박에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B씨는 감금 한 달째 되던 날 새벽, 감시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범죄 단지 건물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악몽은 계속됐다. 캄보디아에서 B씨를 납치했던 중국계 범죄 조직이 B씨 명의로 법인을 여럿 차리고 사기 범행을 벌인 것이다. 이 때문에 B씨는 모든 금융 계좌가 정지됐고 수천만원대 사기를 벌인 혐의로 한국 경찰에 입건돼 수사를 받고 있다.

“캄보디아에 다녀오면 빚도 청산하고, 돈도 벌 수 있다.” 빚에 몰린 20대 C씨는 이런 대부 업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C씨가 지난 6월 불법 대부 업체에 220만원을 빌리면서 지옥이 시작됐다. 연 이자가 5000%가 넘었다. 빚 상환이 늦어지자 대부 업체는 C씨에게 “캄보디아에 있는 카지노 회사에서 일주일 동안 일하면 빚도 탕감해주고, 30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대부 업체에선 캄보디아행 항공권까지 구입해줬다. B씨는 아버지에게 “일주일 정도 일하고 오겠다”며 7월 17일 캄보디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카지노 회사란 곳에 도착해보니 보이스피싱 범죄 단지였다. 중국 범죄 조직원들은 C씨에게 “대부 업체가 너를 우리에게 팔아넘겼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이스피싱 사기로) 한국인들의 돈을 뜯어내라”고 했다. C씨는 이틀 뒤 새벽, 죽음을 각오하고 건물 3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 C씨는 한국으로 돌아온 지 닷새 만에 캄보디아에서 겪은 지옥 같은 경험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C씨 진술을 토대로 불법 대부 업체를 수사 중이다.

[프놈펜=이기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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