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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노년은 가라, 행복한 ‘일본 은퇴 남성’의 비결

조선일보 이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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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노년은 가라, 행복한 ‘일본 은퇴 남성’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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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도, 할 일도, 약속도 없다”
3無가 부른 ‘리타이어먼트 블루’
노후 행복, 결국 스스로 만드는 것
[당신도 정년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갈 곳 없고, 할 일 없고, 만날 사람도 없다…

은퇴와 동시에 ‘직장인’ 명함을 내려놓는 순간 맞닥뜨리는 3대 고민이다. 은퇴자 커뮤니티에는 “월요일 아침만 되면 어딘가 가야 할 것 같고,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이 자주 올라온다. 하루를 채울 일이 사라진 은퇴자의 시간은 유난히 더디게 흐른다.

강은영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연구위원은 “은퇴 후에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급격히 줄어들고, 새로운 친구나 인연을 만들 기회도 많지 않아 자칫 고립감을 느끼기 쉽다”며 “같은 은퇴자라고 해도 경제적 상황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갈 곳도, 할 일도, 약속도 없다”

3無가 부른 ‘리타이어먼트 블루’

노후 행복, 결국 스스로 만드는 것



직장을 떠난 뒤 느끼는 공허와 고립감은 단순한 외로움에 그치지 않는다. 신체와 정신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은퇴 후 삶의 준비가 필요하다.

정년 퇴직 후에도 인생은 계속됩니다. 이경은 기자가 전하는 ‘더 즐거운 노후의 비밀’, 조선멤버십 전용 기사입니다. 멤버에게는 더 많은 혜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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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갈등·우울... 인생 2막의 그림자

은퇴 후의 고민은 단순히 생활비 같은 금전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가 끊기고 일상이 흐트러지면, 신체와 정신 건강이 모두 영향을 받는다. ‘갈 곳 없음, 만날 사람 없음, 할 일 없음’은 마음을 갉아먹는 지옥이다.


강은영 연구위원은 이렇게 지적한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배우자와 함께하는 시간도 자연스레 많아집니다. 부부 사이에 더 큰 친밀감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생활 패턴이나 기대가 달라지면서 오히려 갈등이 불거질 수도 있어요.”

자녀가 독립하거나 결혼해 집을 떠나면, 부모와의 관계가 예전보다 느슨해지면서 허전함이 더 커질 수 있다고 강 위원은 덧붙였다.


가족과 사회적 관계가 줄어드는 노후에 고령자의 정신 건강이 악화되는 모습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보건복지부 노인 실태 조사(2023년)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자의 11.3%가 우울 증상을 보였고, 연령이 높아질수록 우울 위험군 비율은 더 증가했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대인 관계가 줄어들수록 고독감이 커지며 정신 건강 악화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은퇴 후 마음이 불안정해지는 현상을 일본에서는 ‘리타이어먼트 블루(retirement blue)’라고 부른다.


심리카운셀러인 야나가와 유미코 씨는 “리타이어먼트 블루의 원인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중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리타이어먼트 블루’를 단순한 일시적 감정이라고 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야나가와 씨에 따르면, 은퇴 후 ‘시간은 많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압박하면 불안과 우울감이 쉽게 찾아온다. 그는 “하루 일과를 작은 목표 단위로 나누고, 가족이나 친구, 지역 사회와의 소통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규칙적인 생활과 사회적 연결망을 유지하는 작은 습관이 우울감 예방의 핵심이다. 특히 은퇴 남성은 운동이나 봉사 등 작은 모임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맡을 때,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감정을 느끼며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전화 한 통이 아쉬운 은퇴자들

“직장 다닐 땐 여기저기서 저를 찾았는데, 은퇴하고 나니 너무 조용해요. 지금은 잘못 걸려온 전화까지 반가울 지경이에요.” 60대 은퇴자 A씨의 말이다.

은퇴 후엔 사회생활 중심이 직장에서 가정과 이웃으로 이동한다. 부부, 자녀, 부모 등 가족 간의 소통과 이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는 것이다. ​

하지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서 삶의 만족도가 꼭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통계는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사회조사 결과(2024년)에 따르면, 13~19세 청소년은 응답자의 80.8%가 가족 관계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50~59세는 58.1%, 은퇴 시기인 60세 이상에서는 55%만이 만족한다고 답했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가족 관계 만족도가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가족 관계 만족도는 나이뿐 아니라 함께 사는 가족 구성에 따라서도 달랐다.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자 가운데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집단은 배우자와 함께 사는 가구(45.2%)였다. 자녀와 함께 사는 경우는 37.5%였고, 1인 가구는 33%로 가장 낮았다.

결국 은퇴는 단순히 직장을 떠나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관계와 가족 관계, 그리고 ‘의미 있는 하루’를 어떻게 다시 설계하느냐의 문제다. ‘갈 곳 없음, 할 일 없음, 만날 사람 없음’이라는 공허를 어떻게 채우느냐가 인생 2막의 행복을 결정짓는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노후 행복,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일본에서는 노후 생활 만족도와 관련된 연구가 한국보다 훨씬 방대하게 이뤄지고 있다. 연구 결과, 배우자 유무가 중·고년 남성의 행복도를 크게 좌우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마이타 토시히코(舞田敏彦) 교육통계학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당신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에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응답한 기혼 남성은 6.5%에 불과했다. 반면 독신 남성은 무려 43.5%가 같은 답을 내놨다.

독신 남성은 건강 위험에도 더 크게 노출됐다. 연구 결과, 독신 남성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할 위험은 기혼 남성의 3.5배, 심장 발작으로 인한 사망 위험은 2.2배, 호흡기계 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은 2.4배에 달했다.

자살률 역시 배우자 유무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55~64세 독신 남성의 자살 위험은 기혼 남성에 비해 2.4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평론가 스기다 슌스케(杉田俊介)씨는 “은퇴 이후에는 경제적 안정 못지않게 사회적 관계와 소속감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며 “직장 중심의 인간관계가 끊기면 고립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지역사회 모임이나 새로운 취미 활동을 통해 사회적 네트워크를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갈 곳 없고, 만날 사람 없고, 할 일 없는’ 공허 속에서도, 스스로 하루를 설계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은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직장을 떠난 뒤 찾아오는 외로움과 공허감은 피할 수 없지만, 의미 있는 일과 관계, 작은 성취로 삶을 채운다면, 인생 2막은 충분히 즐겁고 풍요로울 수 있다. 행복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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