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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대통령, 여자는 미스코리아’?…미인대회에 날린 강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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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대통령, 여자는 미스코리아’?…미인대회에 날린 강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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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8일 서울 남대문 메사 팝콘홀에서 열린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마지막 축제. 대회 심사위원 대신에 격려위원 제도를 도입했는데, 세계 각국 의상을 입은 격려위원들이 고별 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페미니즘 축제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4년 5월8일 서울 남대문 메사 팝콘홀에서 열린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마지막 축제. 대회 심사위원 대신에 격려위원 제도를 도입했는데, 세계 각국 의상을 입은 격려위원들이 고별 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페미니즘 축제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살다 보니 저절로 페미니스트가 돼 버린 내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에 합류하게 된 것은 1996년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로 일하다 그만둔 뒤 첫 책을 막 출간한 상황이었다.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는 책으로 독일 여성운동의 성과를 소개하며 당시 한국 사회의 성차별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워킹맘으로 미친년 널 뛰는 듯한 삶을 살다가 결국 그만두고 2년간 독일에 체류하면서 공부한 내용들이 자원이 됐다. 책 출간 직후 어느 날인가 나는 문화일보를 방문하게 됐다. 그런데 책을 받은 한 남자 기자가 이런 말을 했다.



“아, 이런 책이라면 유숙열 기자를 만나야 하는데…. 아주 맹렬한 페미니스트 기자가 있어요.”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나왔다. 페미니스트라면 기사를 좀 잘 써 주겠지 하는 기대 정도였다. 그런데 며칠 뒤 그 기자한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문화일보 근처의 어느 식당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좀 긴장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맹렬한” 페미니스트를 만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 만난 그녀는 맹렬하기보다 시크했다.



함께 밥을 먹으며 유숙열은 이프에 대해 소개하면서 함께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겉으로 드러난 내 반응이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속으로는 환호가 터졌다. 진심으로 바랐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에 있을 때 탐독했던 잡지에 ‘엠마’가 있었다. 대표적 페미니스트 잡지인 엠마를 통해 독일 여성운동을 알게 됐고, 결국 책도 쓰게 됐던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막막했던 귀국길에서 한국의 ‘엠마’를 만든다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나는 곧바로 창간호를 준비 중이던 편집팀에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만나 보니 모두 다 재원들이었다. 무엇보다 도발적 상상력과 발랄한 재치가 빛을 발했다. 모임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과 통쾌한 웃음, 신랄한 풍자들이 피어났다. 나는 창간호에 이문열을 비판하는 기사 ‘‘선택’의 작가 이문열 서생에게-한 조선조 여인의 일갈’을 게재했다.



그렇게 이프를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문화운동을 하던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있었는데 조한혜정 선생이 내게 제안을 했다. 페미니스트 명랑소설 혹은 무협소설 같은 걸 써 보자는 것이었다. 들을 땐 그냥저냥 넘겼는데 이상하게 여운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때인가 이프가 재정적으로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그 제안이 떠올랐다. 페미니즘 책이라도 가볍고 재미있는 소설류라면 팔리지 않을까? 많이 팔리면 이프 재정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소재를 찾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김신명숙 작가가 1999년 펴낸 페미니즘 소설 ‘미스코리아 대회를 폭파하라’ 표지. 필자 제공

김신명숙 작가가 1999년 펴낸 페미니즘 소설 ‘미스코리아 대회를 폭파하라’ 표지. 필자 제공


그렇게 해서 휘리릭 쓰게 된 책이 1999년 5월 초에 나온 ‘미스코리아 대회를 폭파하라’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가행사 수준의 지위를 누리며 ‘남자는 대통령, 여자는 미스코리아’란 욕망을 생산해 내던 미인대회에 페미니즘의 유쾌한 펀치를 먹여 보자는 의도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프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인 연두보라. 그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스트 일당이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자를 내보내 진에 당선되도록 한 뒤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대회를 비판하는 폭탄선언을 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대회 주인공이 대회를 부정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핵심 아이디어였다.



책을 쓰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판매가 걱정이었다. 잘 팔려면 광고를 해야 하지만 돈이 없었다. 결국 책을 알리는 행사를 하기로 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모았다. 원래 나는 일종의 패러디로 남자들을 무대에 세우는 미남대회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회의 과정에서 기각되고 결국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로 결정됐다.



2004년 5월8일 서울 남대문 메사 팝콘홀에서 열린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마지막 축제를 앞두고 자원봉사자들이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4년 5월8일 서울 남대문 메사 팝콘홀에서 열린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마지막 축제를 앞두고 자원봉사자들이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책 홍보행사로 기획된 데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이 행사가 그렇게 큰 관심을 끌 줄 몰랐다. 그러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99년 5월15일 오후 5시 문화일보 홀에서 개막된 제1회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하 안티 페스티벌)에는 300석 규모의 공간에 1천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언론의 관심도 폭발적이었다. 모든 것이 서툰 아마추어들의 무대였지만 출연자들은 미인대회를 비롯해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차별을 ‘웃자! 뒤집자! 놀자!’는 이프 스피릿에 기반해 드러내고 풍자하고 놀렸다. 무대와 객석은 하나가 되어 웃고 박수 치고 환호하며 행사장을 달궜다. 여성을 육체로, 성적 대상으로만 보려 하는 사회의 지배적 시선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욕망을 긍정하려는 여성들에 의해 심판대에 올랐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축제가 탄생한 것이다. 이 축제에는 영화계와 정계에 있던 일부 남성들도 함께했다.



확실히 한국 사회는 충격을 먹은 것 같았다. 여성운동이 사회운동으로 자리 잡았지만 여성의 이미지는 여전히 희생자, 피해자, 무력자, 거세된 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들이 떼로 일어나 욕망을 말하고 남성 권력을 비웃으며 뒤집으려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보호는 해 줄 수 있지만 도전은 불쾌했을 것이다.



유숙열과 나는 격려위원으로 행사에 참여했다. 격려위원은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에 해당하나 역할은 전혀 달랐다. 미스코리아 대회는 경쟁의 장인 콘테스트였지만 안티 페스티벌은 모두가 한데 어울려 노는 축제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격려위원들은 관객을 포함한 모든 주인공들이 더 신나고 즐겁게 놀 수 있도록 이런저런 일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었다. 축제의 스릴과 재미를 위해 수상자를 선정하기는 했으나 기준은 능력이 아니었다. 무대 위 퍼포먼스가 훌륭했던 참가자가 아니라 ‘이 매몰찬 사회에서 너무나 고생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웃고 사시라’는 의미에서 어눌한 시낭송을 한 장애인에게 상이 돌아갔다.



원래 일회성 행사로 기획됐던 안티 페스티벌은 기대 이상의 성공으로 이프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름은 그대로였지만 주제는 외모의 정치뿐 아니라 직업상의 차별, 여성과 스포츠, 평화 문제 등으로 변주를 계속했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이프 편집실은 그해의 안티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해졌다. 이 행사를 6년간 유지하는 데 가장 어려운 재정 문제를 책임진 사람은 엄을순 이프 대표였다. 조금 늦게 이프에 합류한 그녀는 유쾌한 성격과 특유의 신바람으로 행사를 축제로 만드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6회로 그쳤지만 안티 페스티벌은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미스코리아 대회를 생중계해 왔던 문화방송(MBC)이 2002년 생중계를 중단했다. 이제 한국의 여아들은 “커서 미스코리아 될래요”라고 하지 않는다. 안티 페스티벌은 2000년 이후 한국사회에 널리 퍼진 안티 문화의 시초이기도 했다. 안티조선운동 등 주류의 부패와 해악에 대항하는 다종다양한 안티운동들에 영향을 끼쳤다.



내 책의 제목과 관련한 몇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출간 직후 영업담당자였던 김영란이 교보문고를 찾았더니 직원이 눈을 크게 뜨고 묻더란다. “이 책을 팔겠다고요?” 한번은 남자 선배 하나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신군부 시절 미스유니버스 대회 폭파 음모 사건을 알아?” 운동권 인사들이 1980년 6월 미스유니버스 대회가 한국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대회장 폭파를 논의했다는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얘기였다. 선배는 그러면서 세월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또 하나는 내 아들과 관련된 얘기다. 초등학생이던 아이가 가정환경조사에서 엄마 직업을 주부라고 했단다. “왜? 작가라고 하지?” 아이 왈 “그럼 무슨 책 썼느냐고 할 텐데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 미스 코리아 대회를 폭파하라…, 그러기 싫어!”



나는 행사가 성공하면서 책이 묻혀 버려 안 팔렸다고 생각했는데 오해였던 것 같다. 어쨌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무지가 탄생시킨 안티 페스티벌은 나름의 소임을 마치고 2004년 막을 내렸다. 당시의 도발적인 포스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We’ll be back!)”






김신명숙 |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휴지기로 접어든 뒤엔 주로 공부와 저술활동을 했다. 공부의 주제는 여신의 전통과 사상이다. 여신학을 주제로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최근까지 대학강의도 하고 단행본과 논문들을 발표했다. ‘여신을 찾아서’와 ‘여성관음의 탄생’을 출간했고, 크레타 미노아 문명의 여신과 여성을 주제로 한 단행본을 곧 출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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