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의 동작 속도 기준을 높인 것은 삼성전자의 프로모션 결과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기업에서 HBM 개발을 담당하는 한 고위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가 경쟁사 대비 HBM4 성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엔비디아 측에 동작 속도를 국제반도체표준화기구(JEDEC)가 정한 기준보다 높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보다 HBM4 초기 샘플 출하는 늦었지만, 이를 기술력으로 만회하기 위해 승부수를 띄웠다.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상향된 엔비디아의 동작 속도 기준을 충족한 최종 샘플을 전달했지만, 엔비디아의 이 같은 요구에 적잖이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통상 HBM은 동작 속도보다 발열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동작 속도를 대폭 높여달라고 요청할 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공급하는 초기 샘플부터 높은 동작 속도를 기록한 것으로 파악된다.
삼성전자는 5세대 HBM(HBM3E)까지 경쟁사에 시장을 내주면서 HBM4에 사활을 걸었다. HBM4에 탑재되는 D램에는 경쟁사에 한 세대 앞선 10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6세대(1c) 공정을 적용한다. HBM4의 두뇌를 담당하는 ‘로직 다이’에는 삼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의 4㎚ 공정을 활용한다. SK하이닉스가 TSMC의 12㎚ 공정을, 마이크론이 D램 공정을 활용하는 것과 대비된다. 경쟁사와 비교해 개발 및 양산에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것을 감수하고 첨단 공정을 적용해 이번만큼은 엔비디아 공급망에 빠르게 진입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1c D램 공정의 빠른 상용화도 경쟁사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르면 내년부터 1c D램 시장이 개화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HBM4 사업에 1c D램 공정을 선제적으로 적용하면서 기술력을 안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D램 시장이 수요가 공급을 넘어서는 ‘호황기’가 예상되고 있는 만큼 앞선 세대 제품 상용화에 속도를 높이고 있는 삼성전자에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설비투자도 가장 앞서 진행했다. 시장의 요구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양산 체제를 선제적으로 구축해 놓은 상태다. 과거 D램 시장을 호령하던 때 시장에 물량을 쏟아내고,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실행할 시스템을 마련한 것이다.
물론 엔비디아의 시스템에 HBM4를 탑재해 샘플을 검증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있다. HBM4가 탑재되는 엔비디아의 루빈 플랫폼에 HBM4를 실장해 진행하는 최종 테스트 과정에서 뜻밖의 품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같은 이유로 품질 테스트 통과가 지연될 경우 그동안 단행했던 대대적인 투자가 되려 패착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HBM3E의 실패를 맛보고 과감한 승부수를 띄운 만큼 HBM4에서는 확실한 성과로 주주들의 기대에 보답할 때다.
전병수 기자(outstanding@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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