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
지금 미국 정부는 거짓말의 향연장이 돼 있다. 그 선봉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엡스타인 파일, 가자 사태, 우크라이나 전쟁 등 정치 문제들은 제외하고 경제 문제만 보자. 트럼프는 관세로 전 세계 기업들이 수조 달러를 미 재무부 금고에 갖다 바친다고 말한다. 액수도 뻥튀기했지만 관세는 외국 기업이 아니라 국내 수입업자들이 낸다. 통상협상을 주도하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일본, 한국 등의 보호장벽 때문에 미국이 그동안 대규모 적자를 봤는데, 트럼프가 이를 시정하는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아부한다. 하지만 한국은 2007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며 보호장벽을 거의 없앴고 서비스와 농산물 부문에서 상당히 큰 양보를 했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거짓말은 국내 정치용이다. 마가(MAGA)로 표현되는 고정 지지층에게 미국이 알게 모르게 손해를 많이 봤고 그걸 대폭 교정하고 있다는 메시지다. 한국과 같은 동맹국에는 거짓말을 넘어 강도질을 한다. 조 바이든 정부는 제조업 부활을 위해 보조금을 주면서 한국 기업들을 유치했다. '암묵적 강제'는 있었지만 '윈윈' 방안을 마련해서 설득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있던 보조금을 폐지하고 고율 관세를 때린 뒤, 관세를 낮추려면 3500억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지난 4~5개월 동안 한미 간 '협상'은 지지부진하고 있다. 그사이 조지아주 공장의 한국 직원들에게 수갑을 채워 구금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현대차 등 한국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며 구애 공세를 펼쳤지만 트럼프가 냉담했다며 '뼈아픈 오판'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강도에게 상처 입고 지갑을 주려고 했는데 집문서까지 내놓으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강도에게 당하는 피해를 줄이려면 덜 중요한 것을 내주고 중요한 것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관세율 25%를 당하고 3500억달러를 주지 않는 것이 낫다. 관세는 해당국의 권한이니만큼 정 때리겠다면 어쩔 수 없다. 반면 3500억달러는 우리가 힘들게 모은 재산이다. 왜 내 것을 넘겨주고 관세율을 낮추는가? 통화스왑을 얻어내도 그것은 나중에 돈을 빌리는 권리일 뿐이다.
내 것과 남 것의 명확한 구분은 지금 트럼프 정부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요구 조건의 근거도 없고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도 언제든 뒤집는데 무엇을 믿고 내 집문서를 넘기는가? 관세율은 나중에 강도 두목이 바뀌면 낮출 수 있다. 직접투자를 늘려 관세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집문서는 넘기고 나면 두목이 바뀌어도 돌려받을 방법이 없다.
강도에게 계속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다른 힘 있는 강도들과 협력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은 그동안 한국에 가장 가까운 동맹이었다. 한국의 안보를 지켜주고 경제 발전을 지원했다. 그래서 경제 기적을 일군 뒤 한국 대통령들이 미국을 방문해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 등을 통해 빚을 갚게 돼 감개무량하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에는 동맹 개념이 없다. 동맹으로 얽혀 있으면 오히려 그걸 지렛대로 삼아 더 많이 강탈하려는 탐욕만 넘친다.
그렇다고 다른 힘 있는 강도에게 전적으로 기대서도 안 된다. 우리는 중국에도 한한령 등을 통해 강도질을 당한 과거가 있다. 그러나 주변 강도들이 경쟁하게 해 우리의 이익과 자존을 최대한 지키려는 모색은 해야 한다. 4대 강국에 둘러싸이고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한국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줄다리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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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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