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63년 10월 11일 48세
1963년 10월 11일 48세
에디트 피아프 1946년. |
캐나다 가수 셀린 디옹은 2024년 파리올림픽 개막식에서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1915~1963)의 노래 ‘사랑의 찬가(Hymne à l’amour)’를 불렀다.
피아프가 사랑을 잃고 나서 가사를 쓰고 부른 노래다. 연인인 마르셀 세르당이 1949년 10월 28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직후 발표했다. 세르당은 복싱 세계 미들급 챔피언에 오른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었다. 1차 방어전에서 미국의 제이크 라모타에게 기권패한 후 재경기 일정이 잡혀 있었다. 114전 110승 4패 기록을 남겼다.
“우리에겐 우리만의 영원함이 있을 거예요/ 저 무한한 푸른 하늘에선 말이죠/ 하늘 위에선 더 이상 아무 문제도 없어요/ 신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하니까요.” (번역 강헌)
연인을 그리워하는 피아프의 목소리가 애절하다. 에디트 피아프가 만들고 부른 사랑 노래로는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1946)도 대표적이다. 배우 오드리 헵번은 1954년 영화 ‘사브리나’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눈동자/ 입가에서 사라지는 미소/ 이것이 나를 사로잡은/ 그의 수정하지 않은 초상화예요.”(번역 강헌)
샹송 가수 이미배는 “피아프의 목소리가 절절한 감동을 주는 건 그가 과거 거리의 악사로 방황하고, 연인을 잃어 본 아픔 때문일 것”(조선일보 2025년 2월 12일자)이라고 했다.
에디트 피아프는 서커스 단원 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17세 때 피아프를 낳고서 사라졌다. 어린 피아프는 매춘업을 하던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열네 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유랑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에디트 피아프 전기 영화 '라 비 앙 로즈'. |
2007년 개봉한 에디트 피아프 전기 영화 ‘라 비 앙 로즈’는 신산스러운 피아프의 삶을 그리고 있다. 피아프는 거리에서 노래 부르며 살아가다가 한 클럽 주인의 눈에 띄어 ‘작은 참새’ 즉 ‘피아프’란 이름으로 데뷔하며 본격적인 노래 인생을 시작했다.
피아프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남편은 가수이자 배우인 자크 필스로 1952년 결혼해 1957년 이혼했다. 두 번째는 20세 연하 그리스 출신 프랑스 가수 테오 사라포였다. 피아프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62년 10월 9일 27세 신랑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 날 결혼식이 열린 파리 16구 구청에는 오전 11시부터 물밀듯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오후 3시에는 서지도 가지도 못할 인간 홍수를 이루었다’(1962년 10월 23일자)고 한다.
에디트 피아프 애정 편력. 1962년 10월 23일자. |
공교롭게도 피아프의 두 남편은 1970년 9월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다. 첫 남편 자크 필스는 64세로 병사했고, 두 번째 남편 테오 사라포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피아프가 마지막 발표한 노래는 1960년 ‘아뇨, 나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이다. “아니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값을 치르고 말끔히 치우고 다 잊었어요….” 마치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노래처럼 들린다.
에디트 피아프와 장 콕토 별세. 1963년 10월 13일자. |
에디트 피아프가 세상 떠난 1963년 10월 11일 같은 날에 프랑스 문인 장 콕토도 별세했다. 장 콕토는 피아프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방랑의 여로를 다한 배”라고 애도의 말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피아프는 장 콕토가 쓴 희곡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다. 장 콕토는 1958년 출간한 에디트 피아프 자서전에 서문을 썼다.
조선일보는 에디트 피아프와 장 콕토의 죽음을 함께 묶어 부음 기사를 썼다. 제목은 ‘영겁에 묻힌 화려한 고독’이었다.
[이한수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