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강경 우익 정권 붕괴 막으려 페소 직접 사들이며 특별 대우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연합뉴스 |
미국이 9일 외환 위기를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 정부에 200억달러(약 28조5000억원) 규모의 통화 스와프 계약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통화 스와프란 두 나라가 서로의 통화를 일정 기간 미리 정한 환율로 교환할 수 있도록 한 계약이다. ‘남미의 트럼프’라 불리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도 가까운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이끄는 우파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제하기 위해 미국이 팔 걷고 나선 것이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인 한국의 통화 스와프 요구에는 소극적이다. 관세 협상 교착 속 우리 정부가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요구하며 “충분 조건이 아닌 필요 조건”이라고 했으나 미국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 트럼프와 밀레이는 ‘특수관계’
스콧 베선트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 DC를 방문한 루이스 카푸토 아르헨티나 경제장관과 이날까지 나흘 동안 회담을 가진 뒤 소셜미디어에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경제 리더십은 공정한 무역, 미국 투자를 환영하는 동맹을 강화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며 “아르헨티나는 심각한 유동성 부족의 순간에 직면해 있고, 이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총 200억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최종 확정했고, 오늘 아르헨티나 페소를 직접 매입했다”고 했다. 미국이 상대국의 외환 시장을 구제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등과 공조하지 않고 ‘페소화 직접 매입’ 같은 일방 지원을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꼽힌다. 이런 조치가 발표되자 아르헨티나 국채 가격은 급등했고, 페소화도 0.6% 상승하며 일주일 만에 가장 강한 수준을 보였다.
트럼프 정부의 이런 전폭적인 지원 배경에는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에도 친숙한 밀레이가 이끄는 우파 정부가 경제 위기로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깔려있다. 2023년 집권한 밀레이는 취임 후 강도 높은 긴축 정책 등 경제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며 일부 성과를 거뒀지만 인위적인 환율 방어가 외환 위기를 심화시키면서 최근 경제·정치 전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 올해 4월 IMF에서 200억달러 추가 구제 금융을 받는 등 여전히 빚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 7일 전체 인구의 약 40%가 거주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선거에서 포퓰리즘 성향의 야당 연합에 패배했고, 이달 말 예정된 총선에서도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다. 블룸버그는 “트럼프와 베선트는 자신들의 정치 동맹인 밀레이가 10·26 중간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돕고, 밀레이의 좌파 경쟁자들이 권력을 되찾을 것이란 공포로 불안해하는 시장을 진정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보수 진영 내에서도 이번 조치를 놓고 세금을 외국 정부 지원에 사용하는 ‘미국 우선주의’ 기조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트럼프는 밀레이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고 있다. 지난달 23일 뉴욕 유엔총회를 계기로 밀레이와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IMF·WB(세계은행) 연차총회 기간인 이달 14일에도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라고 베선트는 전했다. 밀레이는 지난해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자 외국 정상 중에서는 가장 먼저 플로리다주(州) 마러라고로 날아가 트럼프를 만났다. 밀레이는 이날 X에서 트럼프와 베선트에 감사를 표시하며 “우리는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경제적 자유와 번영의 서반구를 함께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 개별 국가 지원 통화 스와프는 이례적
그래픽=백형선 |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상시 통화 스와프 약정을 체결한 건 캐나다·영국·일본·스위스·유럽중앙은행 등 5곳뿐이다. 이들은 모두 미국 달러와 함께 기축통화로 분류되는 화폐를 쓰고 있는 나라들이다. 기축통화국 외에 미국이 개별 국가 지원을 위해 통화 스와프를 동원하는 것은 일종의 ‘특혜’다. 미국 입장에서 통화 스와프는 상대국 통화를 담보로 달러를 빌려주는 것이어서 지원 국가가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국가 부도(디폴트)를 낼 경우 큰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위기같이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미국까지 피해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통화 스와프 약정을 맺기도 한다. 연준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2020년 코로나 위기 때 한국 등 일부 국가와 한시적으로 통화 스와프 약정을 맺었지만 현재는 종료된 상태다. 코로나 때는 호주·브라질·한국·멕시코·싱가포르·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뉴질랜드 등 9국과 각각 300억~600억달러의 통화 스와프 약정을 맺었다. 우리 정부는 3500억달러 대미(對美) 투자를 약정한 관세 협상과 관련해 반대급부 성격으로 미 측에 통화 스와프를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 측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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