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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의 ‘조인트벤처’ 추진, 한국이 위험 떠안고 수익은 미국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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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의 ‘조인트벤처’ 추진, 한국이 위험 떠안고 수익은 미국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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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원자력발전인 고리 1·2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턴키’(일괄) 방식으로 지어 우리가 원전 기술을 배울 여지가 없었다. 국내 최초로 해체 작업이 시작된 고리 1호기의 모습. 연합뉴스

한국 첫 원자력발전인 고리 1·2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턴키’(일괄) 방식으로 지어 우리가 원전 기술을 배울 여지가 없었다. 국내 최초로 해체 작업이 시작된 고리 1호기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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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불공정 원자력발전소(원전) 협정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불공정한 협정의 책임이 있는 한수원은 책임을 인정하기는커녕 종속을 구조화하는 조인트벤처(합작투자)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불공정한 협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독자 기술이 없어 그렇다고 말한다. 황 사장은 “원자력계 일부에서 기술 자립을 100% 우리 기술로 다 확보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는 그런 발언이 있었지만, 결국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국산화를 달성했다는 원전 업계의 자부심은 거짓말이었다는 것이다.







설움과 불굴의 원전 역사







한국 원자력산업의 역사는 ‘설움과 불굴’의 역사다. 한국이 원전 설립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때는 1970년대 초반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전 설립을 위한 원자력법, 원자력연구원, 원자력공학과 등을 만들었다. 그 토대 위에 박정희 대통령은 실제로 원전을 짓기 위해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한국은 산업화를 위해 안정적 전력이 필요했다. 또 원전 개발을 하며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 1971년 주한미군 7사단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자주국방을 향한 열망이 커졌고 원전 개발 의지도 강해졌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이 460억원인데, 고리 1호기를 만드는 데 무려 1560억원이 투입됐다. 국운을 건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한국 첫 원전인 고리 1·2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턴키’(일괄) 방식으로 지었다. 웨스팅하우스가 다 만들어주고 구동 열쇠만 우리에게 주는 방식이다. 우리가 원전 기술을 배울 여지는 없었다. 다음 프로젝트인 고리 3·4호기는 턴키가 아닌 분할 발주 방식으로 진행됐다. 사업 단위를 분할하고 국내 업체들이 참여해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웨스팅하우스가 기술 전수를 수월하게 해주진 않았다. 정부는 프랑스의 프라마톰(울진 1·2호기), 캐나다원자력공사(월성 1호기)로 업체를 바꾸며 협상력을 높였다. 업체들을 경쟁시켜 기술을 더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1979년은 원전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해다. 원전에 진심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다. 한국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후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압박을 못 이겨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다. 원자력연구원이란 이름도 에너지연구원으로 바꿨다. 그러면서도 원전 기술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도록 미국을 설득했다.



1979년 일어난 또 하나의 큰 사건은 미국에서 발생한 스리마일 원전 사고다. 노심이 모두 녹아내린(멜트다운) 대형 사고였다. 전세계가 원전 공포에 휩싸였고 미국 원전산업은 한순간에 소실됐다. 스리마일 원전의 원자로 설계·제작을 담당한 기업 ‘배브콕 앤 윌콕스’(BW)는 파산했고 웨스팅하우스와 컨버스천엔지니어링(CE)도 사업을 접어야 할 판이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불공정 원자력발전 협정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는 가운데, 한국수력원자력은 책임을 인정하기는커녕 종속을 구조화하는 조인트벤처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이 2025년 8월1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관련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불공정 원자력발전 협정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는 가운데, 한국수력원자력은 책임을 인정하기는커녕 종속을 구조화하는 조인트벤처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이 2025년 8월1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관련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을 이용해 한국은 본격적으로 원전 기술을 확보하기로 했다. 국내 기술을 체득할 수 있도록 똑같은 노형의 원전을 반복적으로 건설했다. 프랑스가 원전 기술을 획득한 전략이다. 미국 원전산업이 붕괴하면서 원전 업체들은 갈 곳을 잃었다. 원전 10여 기를 짓겠다는 한국에 그들은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줘야 했다. CE는 자사의 모든 기술을 전수해주는 조건으로 한국과 손을 잡았다. 1987년 한국은 CE와 기술 전수 계약을 했다. 그렇게 CE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국형 표준 원전’(KSNP) 설계가 만들어졌다.



글로벌 원전산업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까지 발생하며 가뜩이나 침체했던 원전은 사망선고를 받았다. CE는 1989년 스웨덴 아베베(ABB)에 편입돼 ‘ABB-CE’가 됐다. 하지만 ABB는 곧바로 한 해 뒤인 1990년 CE를 영국핵연료공사(BNFL)에 매각했다. CE는 BNFL의 자회사가 됐다.



웨스팅하우스도 원전사업을 포기하고 1995년 미디어 기업 시비에스(CBS)를 인수했으며 이름도 CBS로 바꿨다. 원전사업 부문은 1999년 BNFL에 매각했다. 자연스럽게 CE는 웨스팅하우스 계열사로 편입됐다. 한국은 CE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국형 원전을 개발했는데 웨스팅하우스와 협상을 하는 이유다.



웨스팅하우스와 CE를 모두 인수한 BNFL은 이를 묶어 2006년 일본 도시바에 팔았다. 도시바는 원전을 짓다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웨스팅하우스는 2017년 파산 신청을 했고, 2018년 캐나다의 브룩필드, 2022년 캐나다의 카메코로 주인이 바뀌었다. 원전 기술은 값어치가 없었다.



CE의 기술을 기반으로 표준설계를 갖게 된 한국은 1997년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 사용 협정을 맺었다. 협정 내용은 비공개지만 당시 협상 당사자였던 이종호 전 한수원 기술본부장의 2022년 조선일보 기고문을 통해 내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특허는 만료돼 의미가 없으므로 만료 기한이 없는 지식재산권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지식재산이 포함돼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개발한 모든 기술은 국내외에서 영구적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수출 승인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조치하는 조항도 삽입했다. 원전 수출을 위해 철저한 대비를 한 셈이다.







준비 안 된 바라카원전 수주







원전산업의 운명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이 계약은 10년이 지난 2007년 종료됐다. 이 계약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웨스팅하우스도 시비를 걸 수 없었을 것이다. 계약을 종료한 이유에 대해 한수원은 독자적으로 원전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대대적으로 ‘독립선언’을 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원전 수출이 10년간 한 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판단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약은 종료되고 주요 핵심 기술은 완전히 국산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2009년 한국은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원전을 수주하게 됐다. 웨스팅하우스는 독자 수출을 추진하는 한수원에 딴죽을 걸었고, 약 20억달러의 로열티 및 기자재 구매를 하게 됐다.



2025년 체코 원전 수주전이 벌어졌고 역시나 웨스팅하우스는 딴죽을 걸었다. 강경하게 대응하던 한수원은 어느 순간 웨스팅하우스와 글로벌 사업 관련 합의를 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 합의 내용은 비공개로 진행됐는데, 이후 언론보도를 통해 일부가 드러났다.



원전 1기당 약 1조원의 로열티 및 구매 대금을 지급하기로 한 점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계약 기간이 무려 50년이고, 한쪽이라도 원하면 5년씩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심각한 점은 사업 구역을 나눈 것이다. 원전을 구매할 여력이 있고 서구 원전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북미, 유럽, 일본 등은 웨스팅하우스의 구역으로 지정됐다.



한국의 아랍에미리트 바라카원전 수주에 웨스팅하우스가 딴죽을 걸어 한수원은 약 20억달러의 로열티 및 기자재 구매를 해야 했다. 바라카원전1, 2, 3호기 전경. 연합뉴스

한국의 아랍에미리트 바라카원전 수주에 웨스팅하우스가 딴죽을 걸어 한수원은 약 20억달러의 로열티 및 기자재 구매를 해야 했다. 바라카원전1, 2, 3호기 전경. 연합뉴스


한수원은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중동, 남미 등을 사업 구역으로 삼았다. 중국 및 러시아 원전 업체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수주가 쉽지 않은 지역이다. 사실상 한국 원자력산업계가 수십 년 동안 수조원을 투자해 개발한 독자 노형을 수출할 길이 아예 막혀버린 것이다.



불공정 협정 논란 속에 한수원은 한술 더 떠서 이를 구조화하는 조인트벤처를 추진하고 있다.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둘 다 노형 설계를 주력으로 하는 기업이다. 조인트벤처를 하면 노형 설계는 웨스팅하우스가 하고, 종합건설(EPC)에 대한 책임은 한수원이 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익명을 요구한 한수원 관계자는 “우리가 어렵게 개발한 독자 노형 설계를 사용하지 못하면서 원전사업의 위험은 모두 한수원이 떠안는 구조다. 중장기적으로 한국 원전 생태계를 웨스팅하우스에 종속시키는 발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원전산업은 기술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힘이 작동한다. 한국이 미국에 비해 국력이 약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독자 원전 설계를 완성하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순탄했던 적은 없었다. 복잡한 시대적 상황을 지혜롭게 활용해 힘들게 취득한 기술이다.







재협상 기회 기다려야







그런데 불공정 협상을 맺어놓고 미국과 친밀해지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조인트벤처를 만들려는 발상은 불온하다. 지금 당장은 협상력이 밀릴 수도 있지만 언젠가 재협상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시기가 온다면 우리의 강점인 원전생태계와 공급망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가 조인트벤처를 맺어버리면 공급망 관리의 책임은 한수원의 몫이기 때문에 무기로 삼을 수가 없다.



한국 원전생태계를 미국에 종속시키는 조인트벤처 프로젝트는 중단돼야 한다. 수십 년간 힘겹게 원전 기술을 확보한 선배들에게, 앞으로 한국 원전 기술을 발전시켜나갈 후배들에게, 원전산업을 응원하고 지원해준 국민에게 할 일이 아니다.



권순우 삼프로TV 취재팀장 soon@3pro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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