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캔터베리 대주교에 지명된 지명자인 사라 멀랠리 런던 주교가 3일 영국 캔터베리의 캔터베리 대성당 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
세계 성공회 신도 8500만명을 이끄는 영국 성공회(국교회) 최고위 성직자인 106대 캔터베리 대주교에 500년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선임됐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은 3일 성학대 은폐 의혹으로 사임한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의 후임으로 사라 멀랠리(63) 런던 주교를 지명했다.
여성 지도자가 영국 국교회를 이끄는 건 1534년 헨리 8세 국왕이 로마 교회와 결별하는 수장령을 선포하고 성공회의 시초를 마련한 이후 처음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각국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세계성공회의 영적·상징적 지도자 역할을 한다. 영국 성공회의 명목상 수장은 국왕이다.
2002년 사제 서품을 받은 멀랠리는 2018년 사상 첫 여성 런던 주교로 임명된 바 있다. 런던 주교는 영국 성공회 서열 5위 자리다. 간호사 출신인 멀랠리는 1999년부터 잉글랜드 지역 최고간호책임자(CNO)로 일하다가 2004년 그만두고 사목에 전념했다.
멀랠리는 지명 이후 캔터베리 대성당에서의 연설에서 자신이 여성으로서는 사상 최초 캔터베리 대주교로 지명된 데 대해 “많은 사람에게 기쁜 역사적인 순간”이라며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교회를 위해 기쁨을 나누겠다”고 했다.
그는 여성이 성공회를 이끄는 일의 의미와 관련, “저는 전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사역과 소명이 꽃피도록 돕는 목자가 되고 싶다”며 “이 순간을 위해 길을 닦아주신 모든 남녀, 평신도와 성직자, 사제와 주교, 그리고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여성에게 감사를 보낸다”고 했다.
멀랠리는 “영국은 복잡한 도덕적, 정치적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다”며 안락사, 난민, 사회 분열 등의 현안을 언급했다. 또 전날 영국 맨체스터에서 발생한 유대교 회당 테러를 두고 “우리 공동체 전반에 걸쳐 분열을 통해 솟구치는 증오를 목격한다”며 “어떤 종류의 증오와 인종차별도 우리를 갈라놓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2003년 임명된 웰비 전 대주교는 교회 관련 활동을 하던 변호사의 수십 년간 아동 성학대 의혹을 알고도 은폐했다는 의혹에 작년 11월 사임했다. 조너선 에번스 전 영국 보안국(MI5) 국장이 위원장을 맡은 왕실추천위원회(CNC)는 웰비 사임 이후 1년 가까이 후임자를 검증해 멀랠리를 찰스 3세에게 추천했다.
멀랠리는 동성 커플 결혼에 대한 교회의 축복을 지지하는 등 진보적 견해를 밝혀 왔다. 로이터는 그가 전임자들처럼 동성애 등 교회 내 쟁점에서 보수파와 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안았다고 보도했다.
보수 성향 단체인 세계성공회미래회의(GAFCON)는 이날 “영국 교회가 지도 권한을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버킹엄궁은 “국왕은 사라 주교가 영국과 전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인 대주교로 임명된 것을 축하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한성공회도 이번 지명에 “획기적인 사건”이라며“성공회 공동체의 새로운 여성 리더십이 가져올 변화를 기대한다”고 했다. 대한성공회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이번 역사적 선출이 성공회 공동체 전체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