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가뭄, 쓰러지는 농가
행정은 부재, 농민은 각자도생
농업용수 확보 대책 시급
“이곳에서 태어나 팔십 평생을 살았지만, 이렇게나 뜨겁고 메마른 여름은 처음이오.”
지난 9일 강릉 송정동 하평들에서 만난 농민 김진상(82)씨는 축 처진 배춧잎을 들여다보며 체념했다. 그의 밭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는 작동을 멈춘 지 오래다. 강릉은 현재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재난사태가 선포되고 제한 급수에 들어간 상태다. 지난 6개월 누적 강수량은 평년의 3분의 1에 불과하며, 생활용수의 87%를 책임지는 오봉저수지의 저수율은 12%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드러냈다. 여파는 곧장 농업 현장으로 번져, 물 한 방울에 생사가 갈리는 작물들이 속수무책으로 시들어가고 있다.
김씨는 지난 8월 중순 배추 모종을 심은 뒤 줄곧 마른 땅과 싸워왔다. 관개 수로가 마른 뒤론 손수 물을 퍼 나르며 쓰러지는 배추를 붙잡았다. 그러나 뜨거운 볕 아래에선 이파리가 금세 시들고 병충해도 더 쉽게 번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마른 흙덩이를 부수며 말을 이었다. “농사에서 물은 전부나 다름없어요. 자라면 자랄수록 더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데, 하늘이 말라버렸으니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더러 가뭄을 겪은 적은 있었지만 올해처럼 길게 이어진 적은 없었다. 그는 “앞으로는 점점 더 뜨거워질 것 같은데, 50년 이어온 농사일도 이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행정은 부재, 농민은 각자도생
농업용수 확보 대책 시급
강릉 송정동 농민 김진상(82)씨의 손끝에서 메마른 흙이 스러지듯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강릉=하상윤 기자 |
“이곳에서 태어나 팔십 평생을 살았지만, 이렇게나 뜨겁고 메마른 여름은 처음이오.”
지난 9일 강릉 송정동 하평들에서 만난 농민 김진상(82)씨는 축 처진 배춧잎을 들여다보며 체념했다. 그의 밭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는 작동을 멈춘 지 오래다. 강릉은 현재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재난사태가 선포되고 제한 급수에 들어간 상태다. 지난 6개월 누적 강수량은 평년의 3분의 1에 불과하며, 생활용수의 87%를 책임지는 오봉저수지의 저수율은 12%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드러냈다. 여파는 곧장 농업 현장으로 번져, 물 한 방울에 생사가 갈리는 작물들이 속수무책으로 시들어가고 있다.
강릉의 상수원인 오봉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냈다. 갈라진 바닥 위로 산화한 광물이 주황색 혈관처럼 퍼져 있다. 강릉=하상윤 기자 |
버티고 버티다 결국 농사를 포기한 이들이 생겨났다. 강릉 송정동 하평들의 한 대파밭에 어린 대파가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다. 강릉=하상윤 기자 |
김씨는 지난 8월 중순 배추 모종을 심은 뒤 줄곧 마른 땅과 싸워왔다. 관개 수로가 마른 뒤론 손수 물을 퍼 나르며 쓰러지는 배추를 붙잡았다. 그러나 뜨거운 볕 아래에선 이파리가 금세 시들고 병충해도 더 쉽게 번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마른 흙덩이를 부수며 말을 이었다. “농사에서 물은 전부나 다름없어요. 자라면 자랄수록 더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데, 하늘이 말라버렸으니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더러 가뭄을 겪은 적은 있었지만 올해처럼 길게 이어진 적은 없었다. 그는 “앞으로는 점점 더 뜨거워질 것 같은데, 50년 이어온 농사일도 이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강릉 생활용수의 87%를 담당하는 오봉저수지가 저수율 12%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을 드러냈다. 최근 위성사진(위)과 비교하면 차이가 극명하다. 카카오맵·강릉=하상윤 기자 |
“작년 여름부터 유달리 기온이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년 같은 땅에서 때가 되면 씨앗 뿌리고, 때가 되면 물 주고, 때가 되면 수확하며 살아온 우리는 기후변화의 징후를 가장 가까이서 뼈저리게 체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평들에서 2대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태준(69)씨는 시든 배추 속잎을 가리키며 말했다. 겉보기엔 푸른빛을 띠지만, 그가 재배하는 배추 가운데 30~40%는 이미 상품성을 잃었다. 벼도 마찬가지다. 한창 알곡이 차오를 시기에 물이 끊기면서 나락은 충분히 여물지 못한 상태로 가을을 맞게 됐다. 감자 수확량은 예년 평균인 평당 9~12㎏에 한참 못 미치는 6㎏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눈앞에서 작물이 타죽는데, 괜찮을 수 있는 농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의 밭이라도 지나가다 말라죽는 게 보이면 물 한 동이라도 붓고 가는 게 우리 마음이오. 그런데 이번엔 물 자체가 없으니 아무것도 못한 겁니다.” 김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릉 송정동 농민 김태준씨가 잎을 틔우기 시작한 배추를 뽑아 보이고 있다. 김씨는 농민으로서 절박한 마음으로 가뭄을 버티고 있다라고 말했다. |
“농사짓는 사람들 사이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졌습니다. 서로 물을 대겠다고 싸움이 끊이지 않아요. 행정이 제 역할만 해줬더라면 이전처럼 정을 나누며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가뭄에 직격탄을 맞은 농민들의 시선은 곧장 행정으로 향했다.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백봉현(70)씨는 “바로 옆 속초시는 지하 저류탱크를 일찍 만들어 시민들이 물 걱정 없이 살고 있는데, 강릉은 객실 1000개, 20~30층짜리 대형 숙박시설 인허가만 내주면서 정작 그에 걸맞은 급수 인프라는 생각조차 안 한 것 같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시에서 적극적으로 예산을 편성해 마을에 관정 100~200개만 뚫어줬다면 이 사태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을 것”이라며, “농가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건 물 끊은 것 말고 없었다”며 현실적 지원의 부재를 지적했다.
강릉 송정동 하평들의 한 대파밭이 가뭄 앞에 속수무책으로 말라붙어 있다. 강릉=하상윤 기자 |
농토 곳곳에서는 주민들이 사비를 들여 관정을 뚫고 농업용수를 나누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송정동 영농회장 권기섭(52)씨는 “자비로 관정 세 군데를 파 이웃들과 물을 나눠 쓰며 작물의 숨통만 겨우 붙여놓았다”며 “마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순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년이라고 올해와 다를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권 회장은 고개를 들어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이번 주말에 온다는 그 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약비가 되길 바랍니다.”
강릉 송정동 농민 김진상씨가 말라붙은 관개 수로에 걸터앉아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강릉=하상윤 기자 |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강릉= 하상윤 기자 jonyyun@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