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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한 번 못 서보고"… '성매매'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 정부와 싸우는 사연은 [사건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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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한 번 못 서보고"… '성매매'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 정부와 싸우는 사연은 [사건 플러스]

서울맑음 / 7.6 °
예술흥행 비자 받아 한국 입국했지만
성매매 업소 공급돼 성 판매 강요 피해
수사기관·법원은 성매매 범죄자 취급
강제퇴거명령에 소송도 줄줄이 패소
유엔서 처음 피해 인정... 재심 청구
헌재, 민사소송법 위헌 여부 심리 중


한 유흥업소 거리.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음. 김주영 기자

한 유흥업소 거리.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음. 김주영 기자


초여름의 햇살이 따갑던 2014년 6월 28일. 인생 처음으로 필리핀 밖 땅을 밟은 마리아(가명·당시 22세)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어릴 적부터 즐겨봤던 한국 드라마를 떠올렸다. 곳곳의 'Welcome' 표지판은 가수로서 마리아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이전시의 도움을 받아 차량으로 한 시간을 달려 경기 의정부시의 한 업소에 도착했다. 번듯한 무대가 설치된 곳이었다. 마리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에 먼저 취업해 있던 다른 필리핀 동료들에게 "공연은 몇 시부터 시작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우린 절대 노래를 부르지 않아. 저건 '위장용'이야"

가족 부양 위해 한국 온 젊은 엄마... 현실은 성착취


필리핀에서 마리아는 직업 공연인이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식구들의 영향으로 일곱 살에 처음 노래 경연에 참여했고, 16세 때부턴 어쿠스틱 밴드에 소속돼 식당에서 노래를 불렀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주변의 지원 속에서 두 살 난 아들과 감사함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마리아에게 한국행을 추천한 건 이모의 친구였다. "한 에이전시가 한국에서 배우나 가수로 활동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다더라"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이모도 일본에서 가수로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낯선 제안은 아니었다. 아들에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미래를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마닐라에서 치러진 오디션에서 마리아는 단번에 합격했다. 1년간 하루 3~5곡을 부르고 한 달에 4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구두 계약을 맺었다. 예술 활동에 필요한 E-6-2비자 발급도 일사천리였다. 함께 출국을 기다리는 이들 중엔 중동 지역에서 가사노동자로 일할 예정인 여성들도 있었다.

2020년 기준 E-6비자 발급 및 업소 인계 과정. 공익인권법센터 어필 '예전에는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보고서 캡처

2020년 기준 E-6비자 발급 및 업소 인계 과정. 공익인권법센터 어필 '예전에는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보고서 캡처


하지만 비행기 탑승을 준비할 때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에이전시가 건넨 항공권엔 멀리 떨어진 소규모 공항으로 이동한 후 싱가폴과 태국을 경유해 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돼 있었다. 한국행을 함께한 관계자는 이따금 마리아의 여권에 부착된 비자를 임의로 떼기도 했다.


주점에 도착하자 불안은 현실이 됐다. 업주는 술을 입에 대본 적도 없는 마리아에게 술을 잔뜩 권한 뒤 손님들과 대화를 하라고 시켰다. 남성 고객의 비위를 맞추며 술을 더 주문하도록 유도하는 게 마리아의 일이었다. 가게 한편에 설치된 음향 시설은 출입국 단속에 대비한 장식에 불과했다.

한국어는 간단한 인사말 정도만 할 수 있어서 도움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마이크 한 번 잡지 못하고 6개월이 흐르자 마리아는 에이전시와 연결된 한국의 공연기획사에 근무지 변경을 요청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마리아에게 기획사는 동두천시의 한 외국인 전용 클럽을 소개해줬다.

성매매 강요에 성범죄 노출... 가스라이팅 시달려


하지만 새 업소에서 마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성매매 강요였다. 필리핀, 스리랑카, 네팔, 이집트에서 온 여성들이 각자 판매해야 하는 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가벼운 신체 접촉부터 성관계까지 각종 성적 행위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분리된 공간도 없는 환경이었다.


마리아가 항의하자 업주 A씨는 "어차피 처녀도 아니지 않느냐"며 압수한 여권을 인질로 삼았다. 계약이 무색하게 마리아는 오후 6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일하며 한 달에 하루만 쉬었다. 외출은 평일 오후 1시부터 3시간만 허용됐지만, 1분이라도 지각하면 벌금으로 20만 원을 내야 했다.

경찰 로고.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찰 로고. 한국일보 자료사진


자괴감이 커져가도 도망칠 엄두는 나지 않았다. A씨는 매일 영업 전에 종업원들에게 정신교육을 했다. 친척 중에 경찰과 판사가 있으니 신고해도 소용없고 허튼 생각하면 생매장을 해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제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여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말이었다.

그러던 2015년 3월. 남성들이 업소를 찾아와 동료들에 대해 캐물었다. 사복 차림으로 단속을 나온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경찰들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한 여성 접객원 8명은 곧 수갑을 찬 상태로 연행됐다. 타국에서 난생처음 당하는 범죄자 취급에 공포심이 엄습했다.


경찰을 믿어도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마리아는 "A씨는 굉장히 친절하고 좋은 사장"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경찰은 A씨가 잠가 놓은 서랍장 안에서 여성들의 빼앗긴 여권을 찾아 돌려주며 "만약 갈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고, 그렇지 않더라도 클럽으론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사실 선택지는 없었다. A씨가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너희가 풀려날 수 있도록 경찰에게 2,000만 원을 줬다"며 더욱 열심히 고객을 유혹해야 한다고 을러댔다. 삼엄한 경찰서를 경험해본 마리아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여성들과 클럽을 탈출했다.

성매매 범죄자 취급에 '출국정지' '강제퇴거' 동시에


소재가 불분명해진 마리아 앞으로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경찰은 외국인 접객원들에 대해 출국정지 처분을 내려달라고 서울출입국·외국인청장에게 요청하는 한편, 본격적인 성매매 혐의 수사에 나섰다. 마리아를 포함한 필리핀 출신 종업원 3명은 영장이 발부된 지 약 3주 만에 붙잡혔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서울출입국·외국인청 세종로출장소. 기사 내용과 직접적 연관 없음.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서린동 서울출입국·외국인청 세종로출장소. 기사 내용과 직접적 연관 없음. 연합뉴스


출입국 당국은 경찰 요청을 받아들여 2015년 3월 13일부터 4월 30일까지 마리아를 포함한 여성들에 대한 출국정지 처분을 내렸다. 동시에 "예술흥행 체류자격으로 입국했음에도 허가된 공연 장소를 이탈해 유사성행위 등을 했다"는 이유로 2015년 4월 7일 강제퇴거명령을 내렸다.

"한국을 떠나선 안 된다"는 처분과 "한국에서 당장 나가라"는 명령이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마리아는 화성외국인보호소로 보내져 구속 상태 피의자처럼 경찰 조사를 받았다. A씨의 아내가 변호사를 대동해 면회를 온 일도 있었다. 남편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라고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마리아는 "감옥에 수감된 듯 허용된 시간이 아니면 함부로 등을 기댈 수도 없었고, 옷을 제때 갈아 입지도 못했다"며 "같은 국적의 동료들과 각자 다른 방에 배치돼 얘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고 떠올렸다. 1년 전 가수의 꿈을 갖고 입국했던 때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이들의 사정을 알게 된 공익법센터 어필이 법률지원에 나섰다. 마리아를 포함한 세 명의 필리핀 여성들을 원고로 "강제퇴거명령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이들은 성착취 인신매매를 당한 피해자들일 뿐, 한국의 선량한 풍속을 해친 범죄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간 E-6비자가 성매매 업소에 외국인 여성을 공급하는 수단으로 악용돼온 점을 강조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1년 "E-6비자로 입국한 이주 여성들이 인신매매와 성매매 착취에 희생되고 있어 특별히 우려한다"고 밝혔고, 여성가족부도 그해 실태 보고서를 펴냈다.

행정소송·국가손배소 패소→유엔 피해 인정→재심 청구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정다빈 기자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정다빈 기자


법원은 그러나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사건 초반 A씨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던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지 못했던 게 발목을 잡았다. 법원은 심리적 지배(가스라이팅)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철저히 통제된 휴식 시간을 두고도 "외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3년에 걸친 행정소송이 패소로 확정되는 사이, 검찰은 출입국관리법 위반과 성매매 혐의를 인정해 마리아 등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마리아는 A씨를 인신매매 및 성매매 강요 혐의 등으로 고소했지만, 성매매 알선 및 상습강제추행 혐의로만 기소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마리아는 이번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걸었다. △출국정지 상태임에도 특별보호 일시해제로 풀려나기까지 45일간 퇴거명령에 의해 구금됐고 △그 상태로 수사까지 받았으며 △A씨 측과 원치 않는 면회에 노출돼 생계에 타격을 입고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E-6 비자 발급 과정에 문화체육관광부와 법무부가 관여한다는 점에서 외국인 여성들의 성착취를 방치한 한국 정부의 책임도 가볍지 않지만, 법원은 이번에도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앞선 소송과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성착취 피해자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이어진 탓이었다.

마리아와 변호사들은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문을 두드렸다. 한국은 1984년 여성차별철폐협약을 비준해, 한국에 의한 권리침해를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는 개인통보 제도를 도입했다. 인권조약에 따르면 신청인은 모든 국내 구제절차를 완료한 후 개인통보를 제기할 수 있다.

위원회는 약 5년간의 조사 끝에 "인신매매 피해자에 대한 경찰과 법원의 고정관념이 진정인들을 피해자로 식별할 수 없도록 했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에서 E-6 비자 문제가 반복된 점과 외국인 여성들의 열악한 지위 등을 감안하면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을 인정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위원회는 "진정인들의 경우 여권 압수, 업주에 의한 신체적 폭력 등 강압적 상황이 고려되지 않아 수사 초기 단계에서 범죄 피해자가 아닌 범죄자로 취급됐다"며 "한국 정부는 진정인 측에 적절한 보상을 비롯해 권리 침해의 심각성과 지속성에 비례하는 완전한 배상을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마리아는 다시 한번 법원으로 향했다. 앞서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을 다시 심리해달라는 재심을 청구하기 위해서였다. 어필은 "위원회의 인용 결정을 재심 사유로 인정하지 않는 현행 민사소송법은 헌법의 국제법 존중주의에 위배된다"며 위헌법률심판제청도 신청했다.

법원 "유엔 위원회 결정도 재심 사유로 인정돼야"



유엔 로고. 게티이미지뱅크

유엔 로고. 게티이미지뱅크


법원은 신청에 일리가 있다고 봤다. 국제인권조약을 비준했다면, 현행 민사소송법이 규정하는 재심 사유만 인정된다고 제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봤다.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국제기구에서 피해를 인정받아도 국내법상으론 아무런 구제를 받을 수 없게 된다는 점도 짚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부는 2월 "국제조약의 목적과 취지를 몰각하는 방식으로 조약의 국내법상 지위와 효력을 부여하고 국내 사법기관이 조약의 의미를 무력화하는 해석을 한다면, 그런 행위 자체가 비엔나 협약 및 해당 국제조약 위반을 구성한다고 할 것"이라며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정부는 "재심 소송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발을 뺐다. 사법적 판단이 없는 한 사실상 아무런 구제 조치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18일부터 이해관계기관 등의 의견을 취합하고 사건 검토에 들어갔다. 헌재 결정이 나올 때까지 재심 소송 절차는 중지된다.

마리아를 지원하고 있는 어필의 김종철 변호사는 "마리아가 성착취 피해를 입은 클럽에선 2018년에도 다섯 명의 필리핀 여성이 도망쳐 나왔다"며 "정부는 1990년대 이후 근본적인 개혁보단 단기적이고 피상적인 대책만 내놓아 인신매매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도록 방치했다"고 꼬집었다.

마리아는 현재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머물고 있다. 체류 자격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마리아는 끔찍한 악몽을 겪은 한국에서 계속 지내고 있는 이유에 대해 "모든 한국 사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자녀를 위해 한국에서 공부하며 일할 수 있길 바란다"고 답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