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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기억할 오늘] 로널드 맥네어의 SF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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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챌린저호 승무원 로버트 멕네어는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50년대 미국 남부 출신으로, 흑인 우주비행사의 SF같던 꿈을 실현시킨 개척자였다. nasa.g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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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월 28일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참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 코너에서 두어 차례 소개한 적이 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승무원으로 선발됐다가 희생된 고교 교사 크리스타 매콜리프(Christa McAuliffe, 1948~1986)와 가수 존 덴버(1943~1997)가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만든 ‘Flying For Me’란 노래 이야기가 그 중 하나였다.

매사추세츠 공대(MIT) 출신 물리학자 겸 우주비행사 로널드 어빈 맥네어(Ronald Ervin McNair, 1950.10.21~1986.1.28)도 희생자 7명 중 하나였다. 그는 1978년 우주비행사로 선발돼 84년 챌린저호 1차 미션(STS41-B)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력자로, 2차 미션(STS51-L)의 탑승운용기술자로 탑승했다. 태권도 유단자에다 프로 수준의 색소폰 연주자이기도 했던 그는 2차 미션 전 작곡가 장 미셸 자르와 함께 ‘랑데뷰 Ⅵ’란 곡을 작곡, 우주에서 그 곡의 색소폰 파트를 연주-녹음해 NASA 창립 25주년 축하공연에 쓴다는 임무도 부여 받은 상태였다. 사고로 그 이벤트는 무산됐지만 곡은 맥네어를 기려 ‘라스트 랑데뷰(Ron’s Piece)’란 곡명으로 그 해 4월 초연됐다.

맥네어는 9살이던 1959년, 혼자서 1.6㎞를 걸어 지역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거부 당한 일이 있었다. 거긴 인종 분리ᆞ차별이 극심하던 사우스 캐롤라이나 레이크시티였다. 담당 사서가 “흑인은 안 된다”며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그는 버텼고, 급기야 사서는 “말썽이 생겼다”며 경찰과 맥네어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출동한 백인 경찰관 2명은 어이없어 하며 사서에게 “그냥 책을 빌려주면 안 되냐”고 종용했다고 한다. 책을 받아 든 맥네어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어머니와 함께 귀가했다.

레이크시티 시의회는 2011년 1월, 이제는 박물관이 된 그 건물 명칭을 ‘로널드 맥네어 박사 생애사 센터(The Dr. Ronald E. McNair Life History Center)’로 개명했다. 그의 형 칼(Carl)은 NPR 인터뷰에서 “60년대 우주비행사는 그야말로 ‘셀럽’이었고, 흑인이 우주비행사가 된다는 건 SF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론은 그걸 ‘과학의 가능성(Science Possibility)’이라 여겼다”고 말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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