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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인터뷰]르파주 "한국인, 신기술과 스토리텔링 접목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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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공연 연출가

1인 연극 '887' 5월29일~6월2일 LG아트센터

뉴시스

로베르 르파주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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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연극은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경험이 돼야 한다. 공동체의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게 낫다. 연극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어야 한다."

캐나다의 공연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62)의 작품은 관객을 무아지경으로 몰고간다.

출세작 '바늘과 아편'을 보자. 사랑을 잃은 세 남자가 중독된 사랑에서 벗어나고자 약물에 중독돼가는 아이러니를 그린다. 상실, 불안, 고독 등의 정서가 주를 이룬다. 공중에 매달려 계속 돌고 있는 대형 정육면체는 뉴욕의 거리, 파리의 호텔 등 끊임없이 바뀌는 시공간을 보여준다. 르파주 미장센의 무기인 영상과 무대 기술은 이 정서를 정확히 떠받친다.

눈을 현혹하는 게 아니라 무대에 흐르는 감정을 풍성하게 만든다. 무대가 바뀔 때마다 인물들은 우주를 유영하듯 무대의 벽을 넘나들고 문을 여닫는다. 정육면체는 결국 우주 속 지구인 셈이다. 한 무대 위에 우주와 지구, 사랑과 인생을 모두 담는다. 연극 관람이 체험으로 승화한다.

르파주는 27일 정동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연극은 사람들과 단순히 커뮤니케이션하기보다 커뮤니언(communion; 교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편하게 넷플릭스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한다. 그런데 공연을 보기 위해 차를 끌고 티켓을 예매하고 아이를 맡기고 공연을 본다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많이 요한다. 이런 상황에서 연극은 이벤트가 돼야 한다."

연극은 일종의 '모태 예술'(Mother Art)이라고 여겼다. 연극이 무용이나 음악이나 문학 등 다양한 예술의 형태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장르에서 연극에 비해 더 빠르게 신기술을 도입하고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연극 장르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기술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만, 예술가로서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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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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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부터 6월2일까지 역삼동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르는 르파주의 1인극 '887' 역시 마찬가지다. 무대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현재의 집, 어린 시절의 아파트 등 세트가 여러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동안 관객들은 열린 마음으로 시공간을 여행하게 된다.

르파주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기억에 대해 다룬다. 작품 제목 '887'은 르파주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주소에서 따온 것이다. 르파주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작은 아파트 건물은 퀘벡시티 머레이가 887번지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택시를 몰던 아버지, 어머니와 4명의 아이들, 치매를 앓던 할머니, 친구들, 그리고 이웃들이 있다.

르파주는 "'887'에 대해 "기억이라는 것이 어떤 현상인가,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작품이다. 기억의 의학적, 과학적 측면뿐 아니라 기억의 모든 것을 탐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야기를 통해 뇌에서 작동하는 기억의 메커니즘, 그렇게 저장된 정보의 완전성에 대한 의문, 그 기억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정체성, 망각과 무의식,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 기억을 매개로 이뤄지는 예술인 '연극'의 기원 등을 종횡무진한다.

"우리의 뇌가 무엇을 기억하고, 왜 기억하는지를 담고 있다. 나의 초년 시절인 1960~1970년대를 들여다본다. 즐겁고 재미있기도 하면서 아픈 기억이었다. 기억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속임수를 쓰는 작동이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르파주는 2003년과 지난해 '달의 저편', 2007년 '안데르센 프로젝트', 2015년 '바늘과 아편' 등의 작품이 한국에서도 공연, 국내 관객들 사이에 마니아 팬층을 구축하고 있다. 이번 '887'을 통해 처음으로 국내 무대에도 오른다. 원래 르파주는 자신이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다. 하지만 그 동안 한국 관객들에게는 연출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887'을 통해 연기력으로도 홀로 무대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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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르파주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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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대에는 1960년대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의 물결 속에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겪으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한 퀘벡의 근대사도 남아 있다.

"1960년대는 나와 가족에게 격동의 시기였다. 동시에 캐나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프랑스 문화권의 퀘벡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겪기도 했다. 개인적인 역사인 동시에 1960년대 캐나다가 겪은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소문자 h로 시작되는 개인적인 역사(history)를, 이에 반응하고 메아리치는 대문자 H로 시작되는 역사(History)로 연결시키는 작품이다. 르파주는 "연극은 사람의 기억을 담아내는 예술이기 때문에 연극과 기억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봤다. "예술이라는 건 역사를 재현해서 기억을 되살리고, 그럼으로써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에 있다."

르파주는 태양의서커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선택한 세계적인 연출가다. 혁신적인 테크놀로지와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현대 연극의 경계를 확장시킨 인물로 평가 받는다. 특히 뉴욕 메트와 작업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가 기술, 영상 등을 적극 활용한 빛나는 연출로 주목 받는 등 공연계 테크놀로지의 선구자로도 통한다.

"이번 '877'에서는 미니 테크놀로지를 사용했다. 기술들을 간소하고 시적인 형태로 연극에 접목시켰다. 하이테크를 사용함에도, 인형극과 흡사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무대에 다양한 미니어처를 사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음악도 르파주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을 한다. 새로 만든 음악보다 기존의 음악을 활용한다. 이번에는 낸시 시내트라의 '뱅뱅', 서프 뮤직 등이다. "쇼팽뿐 아니라 60년대 팝 음악을 많이 사용한다. 작품에서 내가 무엇을 왜 기억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되는, 내 경우에는 60년대 팝 음악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오늘날 대사도 외우기 힘들어하는 내게 왜 이 때의 음악은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지, 음악은 내 기억을 작동하게 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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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도 많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팝 컬처, TV, 라디오를 많이 접했는데, 친구 중에 오페라를 보던 이상하지만 착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클래식을 들으면서 느꼈던 오묘한 감정이 있었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 가진 힘을 작품에서도 언급하는 순간이 있다."

한국에는 젊은 관객들이 많아 좋다는 르파주는 8년 전 MIT 미디어 랩 초대로 연극 제작 워크숍을 했을 당시 참석자 중 3분의 2 이상이 한국인이어서 매우 놀랐다. "한국사람들이 신기술과 스토리텔링을 연결시키는 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느꼈고, 그 현상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여러 극단에서 작업해 온 르파주의 무대미학, 미장센이 백화제방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실험적인 공연 단체 '엑스 마키나(Ex Machina)'를 설립하면서부터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언어에 관심이 있는 예술가'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싶다. "언어라는 것은 텍스트뿐 아니라 사람들, 여러분과 소통하는 방식을 뜻한다. 대사나 텍스트뿐 아니라 사운드, 이미지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모든 언어가 나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다양한 작업을 해온 르파주는 영화를 5편 만들었는데, 영화를 하면서 무대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대에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영화를 만들고 있네'라는 의심이 들었다. 영국 기자가 르파주는 훌륭하게도 마치 실패한 영화 감독처럼 무대를 연출한다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하."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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