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7 (수)

“공책 한권 안팔려” 문방구가 사라진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HanI

[한겨레] 10년간 점포1만개 급감 ‘고사위기’

마트·대형사무용품업체에 밀리고

3년전 시행 ‘준비물지원제’ 직격탄 

“최저가입찰 대신 영세점 우선구매를”


그곳엔 없는 것이 없었다. 짝꿍이 들고 나타난 총천연색 향기나는 볼펜도, 출출한 하굣길 궁금한 입맛을 달래줄 ‘쫄쫄이’와 ‘뽑기’도, 밤마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8비트 오락기 속 ‘페르시아의 왕자’도, 모두 문방구에 있었다. 지금은 교사가 됐지만, 어린 시절 “꿈이 뭐냐”고 어른들이 물으면 강은수(가명·32)씨는 “문방구 주인”이라고 답하곤 했다.

“지난해 우연히 모교를 지날 일이 있었는데 단골 문방구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편의점이 생겼더라고요.” 강씨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학교 오가는 길에 참새 방앗간 들르듯 문방구에 들렀다. 급할 땐 맘씨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외상으로 준비물을 챙겨주기도 했는데, 어린 날 추억도 함께 사라진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문방구가 사라지고 있다. 초등학교 하나를 둘러싸고 경쟁하던 조그만 소매문구점들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27일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국의 소매문구점은 1999년 2만6900여개에서 2009년 1만7800여개로 줄었다. 10년 만에 1만개가 사라졌다. 추락 속도는 가파르다. 2011년엔 1만5700여개로 다시 2000여개가 줄었다.

다른 골목상권과 마찬가지로, 대형마트의 무분별한 출점과 대형 사무용품업체의 등장은 소매문구점의 고사를 예고했다. 3년 전 시행된 정부의 ‘학습준비물 지원제도’도 주 원인으로 꼽힌다. 아이들의 준비물을 챙겨줘야 하는 맞벌이 학부모와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된 제도로, 시·도교육청이 학습준비물 예산을 지원하면 각 학교가 공개입찰을 통해 준비물을 구매한 뒤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박리다매’로 승부해야 하는 ‘최저가 입찰 제도’에 영세상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소매문구점 상인들은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서울 중랑구의 중곡초등학교 앞에서 6평(19.8㎡)짜리 영세한 문구점을 운영하는 김영숙(49)씨는 27일 문구점에 냉장고를 들였다. 새 학기가 돼도 이제 아이들은 공책을 사려고 문구점을 찾지 않는다. 중학생 노트는 올해 들어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매출이 3년 전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어요. 아이스크림이라도 팔아야지, 버틸 재간이 없더라고요.” 김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인근에서 20년 동안 문방구를 해온 이웃은 이달 생활정보지에 점포를 내놨다. 큰돈 바라지 않고 엄마 마음으로 문구점을 운영해왔다. 정부가 우리 같은 소상인도 먹고살 수 있게 해줬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김씨 같은 소매문구점 주인들이 처음으로 뭉쳤다. 문구 상인들의 모임인 학습준비물 생산·유통인협회와 경제민주화국민운동본부는 27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학습준비물 지원은 좋은 제도이지만, 중소상인들이 철저히 배제당하고 있는 만큼 학부모에게 소매문구점에서 사용할 바우처를 주는 제도를 검토하거나, 영세한 중소상공인 협동조합이나 지역의 문구점에서 우선 구매하도록 정책을 마련해 골목상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대형마트뿐 아니라 최근엔 오피스디포 등 다국적기업까지 문구류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정부가 문구 생산과 유통을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공식 SNS [통하니] [트위터] [미투데이] | 구독신청 [한겨레신문] [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