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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보문동의 마스크 기적… 주민 수만큼 1만6000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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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명 잠 못 자며 3교대로 재봉틀 돌려… 지역사회 힘으로 ‘셀프 보급’ 감격
한국일보

서울 성북구 보문동 주민들이 최근 성북구패션봉제지원센터에서 천마스크 1만 6,000개를 만든 뒤 환하게 웃으며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그들은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김은미(첫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씨는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미세먼지가 심해 마스크가 앞으로 계속 필요할 것"이라며 "환경 보호 차원에서라도 재활용하는 천마스크를 계속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다. 성북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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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르륵~”.

지난 2일 오후 3시 서울 성북구패션봉제지원센터 2층에선 재봉틀 소리가 100㎡(30평) 남짓의 작업실을 꽉 채웠다. 전문 재봉사가 아닌 평범한 보문동 주민 10여명이 발을 굴려 재봉틀을 돌리는 소리였다.

격자무늬의 천은 재봉틀 노루발 아래로 드르륵 소리를 내며 빨려 들어갔다. 흐느적거리던 타원형의 천 가장자리는 박음질로 단단해졌고, 두 겹의 천이 한 데 묶여 마스크 모양을 제법 갖춰 나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천마스크 제작 현장으로, ‘비상시국’에 육중하게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에 사소한 농담은 낄 틈이 없었다.

진지했던 자리, 이날 200여개의 마스크 제작이 끝나자 한 여성이 재봉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안 이러려고 했는데…. ” 김은미(53)씨는 창 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그에게 이날은 특별했다.

보문동 주민 수와 같은 마스크 1만6,000개 제작. 주민 모두에게 차별 없이 마스크 1개씩을 나눠줄 수 있게 된 순간을 맞았던 것이다. 지난달 21일부터 이날까지 13일 동안 하루에 주민 25명이 3교대로 마스크 제작에 손을 보태 빚은 성과였다.

김씨는 “그 동안 함께 고생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울컥했다”고 했다. 심재순(69)씨는 “이렇게 누구를 돕기 위해 주민들과 공동작업을 해 본 건 처음”이라며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다들 함께 모였고, 이 작업을 통해 각박한 세상에서 희망을 봤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천마스크 제작엔 보문동 주민 400여명이 참여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 하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으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 공간에선 연대로 위기 극복 기반을 다진 것이다.
한국일보

서울 성북구 보문동 천마스크 자원봉사자 중 최연소인 초등학생 2학년 학생(사진 오른쪽)은 어른들 사이 ‘똑순이’라 불린다. 쪽가위를 야무지게 잘 쓴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성북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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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의 천마스크 ‘셀프 보급’은 정부 도움 없이 오롯이 지역사회의 힘으로 이뤄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골목 봉제 업체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보문동에 둥지를 튼 20여 봉제 가게에서 천 마스크의 원단을 대고, 마무리 작업을 도왔다. 봉제 일을 하는 권여명(57)씨는 “제작에 참여한 주민 대부분이 재봉틀을 처음 써 봐 바늘도 쉬 부러뜨리고 바늘에 찔리기도 했다”며 “초보자들이 일정하게 박음질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각 봉제 가게에서 쓰다 남은 원단을 십시일반 도움 받았다”고 말했다. 쑥스럽게 나온 말이지만, 지역 공동체의 코로나19 대응 미담으로 길이 남을 스토리를 썼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시작은 소박했다. “약국에 오래 줄 서 기다리는 어른들 보기가 안타깝다”는 보문동 새마을문고 회원 15명의 마음이 통하면서 마스크 제작으로 뜻이 모였다. 입소문이 퍼지자 초등학생 2학년부터 78세 노인까지 다양한 주민들이 봉사를 자청했다. 낮엔 일하고 밤엔 마스크 제작 봉사에 참여한 ‘주경야봉’파도 있었다. 정정숙(60)씨는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해 나도 퇴근 후에 일을 거들었다”며 “그 덕에 얼토당토않을 줄 알았던 일을 해낸 것 같다”며 웃었다.

보문동의 400여 ‘작은 영웅’들이 만든 1만6,000개의 마스크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인 16일부터 지역 주민들에게 배포될 예정이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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