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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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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스페인 석사도 독일서 알바 한다···“EU 분열, 코로나 탓”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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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국제정세를 영화를 통해 쉽게 풀어낸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가 2020년 시즌2로 독자 여러분을 다시 찾아갑니다.

신종 코로나 감염증(코로나19)으로 전 세계가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시작은 중국이었지만 지금은 미국과 유럽의 상황이 심각하죠.

유럽 국가들은 부랴부랴 국경부터 통제했습니다. ‘국경 통제’라는 말이 요즘처럼 흔한 때는 없습니다만, 유럽 국가들의 이런 결정은 다소 놀랍습니다.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하는 ‘솅겐 조약’이 유럽연합(EU)의 핵심 원칙 중 하나였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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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로 인한 피해가 막심한 이탈리아에서 의료진 중 한 명이 선물 받은 헬멧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라찌에(감사합니다)'라고 쓰여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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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눈길이 가는 건, 이런 위기 속에서 유럽 국가들의 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단 사실입니다. EU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몇몇 국가는 중국의 도움을 받았는데요. 때문에 EU 측이 “중국이 이런 식으로 유럽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걸 주의해야 한다”고 경계심을 내비치기도 했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입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피해가 막심한 남유럽에선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유럽공동채권’을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독일 등 부국들은 반대합니다. 남유럽 재정 위기가 터졌던 2011년의 상황과 흡사하죠. 그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탈리아가 위기를 맞으면 EU는 타격을 입을 테고, 이탈리아 국채를 쥔 유럽 은행들이 한국에서 자금을 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EU가 흔들리는 게 과연 신종 코로나 때문일까요? 흔들리는 유럽연합의 위기,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에서 짚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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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의 한 장면. 유럽 각국에서 모여든 청년들이 함께 살며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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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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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프랑스 파리.

방황하던 스물다섯 청년 자비에(로망 뒤리스)는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지인의 권유 때문이었죠.

“유럽연합의 경제 정책으로 고용 시장이 살아날 거야. 스페인 대학원에 진학해서 경제학을 공부하게. 스페인어와 경제학 석사면 어딜 가든 꿀리지 않아.”

13년이 흘러 2015년 스페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절망에 빠져있던 우고(욘 곤살레스)와 브라울리오(훌리안 로페스)는 독일 베를린으로 향합니다.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인 독일에 가면 일을 구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서요. 그러나 말도 안 통하고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우고는 이렇게 푸념합니다.

“한 달간 일자리를 찾으면서 알게 된 건, 여기서 일자리를 찾는 스페인 사람들이 많단 사실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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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독일로 가자!'의 한 장면. 우고(맨 왼쪽)는 스페인의 엘리트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베를린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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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독일로 가자!'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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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영화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2002)고요. 우고와 브라울리오가 등장하는 코미디는 ‘독일로 가자!’(2015)라는 작품입니다. 두 영화 모두 젊은이들의 방황과 사랑, 성장을 그린 이야기인데 분위기가 사뭇 다르죠.

2002년 EU 교환학생 프로그램 ‘에라스무스’를 통해 스페인으로 향한 자비에는, 파리에 남은 애인을 그리워하다가도 다양한 국적의 룸메이트들과 살며 생기는 일들 때문에 바쁩니다. 취업 걱정은 별로 안 하죠. 같은 20대인데 우고와 브라울리오의 처지는 너무도 다릅니다. 우고가 ‘썸’을 타려 하자 브라울리오가 충고하죠.

“우리가 에라스무스 교환학생으로 온 줄 알아? 정신 차려!” 결국 두 남자는 케밥집에서 일하게 됩니다.

2002년과 2015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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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미셸 EU 이사회 의장이 지난달 26일 신종 코로나 위기 대책 마련을 위한 화상 회의를 마친 후 기자회견을 가졌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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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국내에서도 출간된 세계적인 석학 조지 프리드먼의 책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의 첫 장은 ‘유러피안 라이프’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유러피안 라이프라뇨! 따뜻한 햇볕과 자유로움, 여유가 떠오르죠?

그러나 프리드먼이 서술한 20세기 초중반 ‘유러피안 라이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헝가리에서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고 미국에 이민 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당시 유럽인들의 삶은 매일이 지옥이었다고 설명하죠.

20세기뿐일까요. 수백 년 동안 유럽에서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죠. 그러나 인류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으로 꼽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선 평화와 통합의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무엇보다 전쟁 후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국이 이를 지지했습니다. 소련과의 냉전에서 서유럽이란 우군이 있어야 했고, 풍요롭고 안정적인 시장도 필요했거든요.

당시의 열띤 분위기는 고전 영화 ‘로마의 휴일’(1953)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앤 공주(오드리 헵번)는 유럽 연방제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하죠.

“유럽의 긴밀한 유대를 이끄는 거라면, 연방제를 찬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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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 역할을 맡은 오드리 헵번.



그렇게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출범했습니다. 프랑스·서독·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6개국이 참여했죠. 5년 후엔 유럽경제공동체(ECC)로 덩치를 키워 점점 회원국을 늘려갔고요. 그리고 소련이 몰락한 몇 년 후인 1993년 드디어 ‘평화와 번영’이란 기치를 내걸고 유럽연합이 출범합니다.

EU는 평화롭고 풍요로웠습니다. 유럽에 속한 나라들은 어떻게든 EU에 가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스페인·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은 물론 구소련에 속했던 동유럽 국가 헝가리·불가리아·루마니아 등도 속속 가입했습니다. 1999년 EU는 화폐를 통합했고 ‘유로존’이 형성됐죠.

피가 마르지 않던 땅에서 평화와 번영이라뇨. 유럽연합은, 혼란스럽지만 열정에 가득 찬 젊음과도 같았습니다. 그 분위기가 녹아있는 영화가 바로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죠. 이탈리아·독일·덴마크·영국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젊은이들은 한데 어울리며 ‘유럽인’이란 정체성을 품게 됩니다.

위기가 닥친 건 2008년이었습니다.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세계 경제가 흔들리자 남유럽이 무너진 겁니다. 2010년 그리스는 구제금융을 받았고 스페인, 이탈리아도 위기를 맞습니다. 당시 그리스와 스페인의 25세 이하 실업률은 60%에 달했죠. 영화 ‘독일로 가자!’에서 우고와 브라울리오가 석사 학위를 가지고도 베를린에서 최저임금을 받게 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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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신종 코로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의식이 열렸다. 루이지 드 마지스트리스 나폴리 시장의 모습.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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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EU의 선택을 주목해야 합니다. EU는 그리스에 긴축정책을 밀어붙였는데요. 유럽 최대 강국인 독일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독일은 빚을 그저 탕감해주는 정책이 공정하지 않다고 봤거든요. 반면 남유럽 국가들은 독일이 EU의 정책을 자국에만 유리하게 만들었다고 봤고요. 이렇게 균열이 시작됐습니다. 그렇다고 독일이 안전한 게 아닙니다. 수출이 GDP의 40%를 차지하기에, 다른 유럽 국가들이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독일 경제도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거든요. 악순환이 시작됐다는 얘기죠.

“경제 위기는 유럽을 심하게 분열시켰다. 유럽 통합의 전망이 그토록 밝아 보였지만, 첫 금융 위기가 닥치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유럽의 통일성이 깨졌다. 독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은 스페인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고, 그 반대도 성립되었다. 번영이라는 약속, 유럽의 일부가 되면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는 핵심 기대가 무너졌다. 운명을 공유한다는 정서도 깨졌다. (중략) 유럽 갈등의 역사는 절대로 끝나지 않았다.” (책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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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유럽연합에 탈퇴를 선언한 당시 런던에서 브렉시트 찬성파의 축하 파티가 열린 모습.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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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에 대한 부정적 전망은 우파ㆍ좌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진영에서 나왔습니다.

유로화를 “공격적 신자유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라 비난한 그리스의 사회주의 활동가 소티리스 콘토야니스는 이렇게 말했죠. “유럽연합은 국가도 아니고 북미자유무역협정과 같은 무역블록도 아니다. 악랄하고 호전적이며 피로 얼룩진 제국주의적 연합이다. 시장 근본주의와 극단적 신자유주의의 보루이기도 하다. (중략) 많은 경제학자들이 유럽연합이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책 『브렉시트와 유럽연합』에서)

분열의 조짐은 몇 년 후 본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2010년대부터 대부분 나라에서 EU에 반감을 가진 우익 정당이 떠오르기 시작했죠. 처음부터 유럽 통합에 떨떠름했던 영국은 아예 탈퇴(브렉시트)했습니다. 이민자와 난민들은 배척당하고 있고요. 경제 위기뿐 아닙니다. 지정학자들은 동쪽에서 세를 키우고 있는 러시아가 유럽에 점점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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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에 맞서 이탈리아인들을 돕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폴란드 의사들. EU의 연대의식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이 늘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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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신종 코로나 위기가 닥쳤습니다. 유럽연합의 미래는 누구도 예견할 수 없지만, 부정적인 전망이 쏟아지고 있죠. “단 한 번도 유로존의 종말을 말하는 이들에 동의한 적이 없지만 이번에는 진짜 그럴 위험이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경제분석기관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우려입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 건, 인간의 인간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국경 통제가 시작됐지만,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독일에서 프랑스의 위급한 환자를 받아 이송하는 사진이 회자한 것처럼 말이죠.

‘로마의 휴일’ 속 앤 공주가 말한 “긴밀한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 유럽 국가들은 다시 서로의 손을 맞잡을 수 있을까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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