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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용균의 베이스볼 라운지]18.44와 27.43 그리고 팬까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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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야구는 ‘거리’의 종목이다. 고정된 위치에서 공을 던져 겨룬다. 투구판과 홈플레이트 사이의 거리 18.44m는 야구의 모든 플레이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한쪽(타자)은 정확하고 강하게 때리려 하고, 다른 쪽(투수·포수)은 정확히 맞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90피트(약 27.43m)는 야구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중요한 ‘거리’다. 베이스 사이의 길이다. 홈플레이트에서 1루로, 3루에서 홈으로 달려야 하는 거리다. 그 거리를 어떻게 안전하게 통과하느냐가 득점과 연결된다.

KBO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2020시즌 스프링캠프 캐치프레이즈는 ‘RESPECT 27.43’이다. 신임 허삼영 감독이 강조하는 가치다. 야구는 아웃이 되지 않고 어떻게 다음 베이스에 도달하느냐의 싸움이다. 단숨에 득점을 노리는 야구가 아니라 베이스 사이의 거리를 존중하는 야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허 감독은 “야구의 모든 플레이에서 기본을 지키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삼성 선수들은 캠프 때 그라운드에 나가기 직전 이 문구를 한 번씩 쓰다듬고 나갔다. 모든 결과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야구는 또 다른 ‘거리’의 종목이다. 단체 구기 스포츠 중 공을 멀리 보내는 것이 목표인 종목은 없다. 대부분 골이나 목표, 엔드라인 등 공을 목적지로 이동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야구는 무조건 멀리 보내는 것으로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종목이다. 홈런은 야구의 꽃이라 불린다. 펜스를 통해 그라운드의 안과 밖을 나누고, 안에서 때린 공을 밖으로 넘김으로써 플레이가 완성된다. 주자의 숫자에 따라 한꺼번에 4점까지 얻을 수 있다. 홈런 타구의 비거리는 기록, 추억, 역사로 남는다. 잠실구장 외야 너머에는 첫 장외 홈런을 기록한 동판이 새겨져 있다. 보스턴 홈구장 펜웨이 파크에는 테드 윌리엄스의 구장 사상 최장거리 홈런을 표시한 빨간색 의자가 놓여 있다.

야구의 거리는 오히려 팬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한다. 까마득하게 멀리 날아가는 홈런은 팬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들어와 꽂힌다. 모두의 허를 찌른, 18.44m를 날아오는 공보다 더 빨리 27.43m를 달려 성공시킨 단독 홈스틸은 홈런보다 더 깊숙이 팬들의 가슴에 들어온다.

코로나19의 확산과 ‘사회적 거리 두기’는 야구와 팬들의 물리적 거리를 떼어놓았다. 시범경기가 취소됐고, 개막전은 연기됐다. ‘거리 두기’의 일환으로 팬들의 사인 요청도 당분간 금지다. 코로나19와 그 트라우마는 야구와 팬들의 거리를 영원히 떼어놓는 게 아닐까.

거꾸로가 될 수도 있다. 트레버 바우어(신시내티)는 “동네 야구 한 판 하자!”고 제안했고, 여러 선수들이 모였다. 바우어의 개인 SNS 채널 등을 통해 생중계됐다. 마커스 스트로먼(뉴욕 메츠)은 개막 연기에 실망한 팬들을 위해 “2021년 WBC에 미국 야구 드림팀을 만들자”고 트위터에 적었다. 코디 벨린저, 워커 뷸러, 피트 알론소, 블레이크 스넬 등 쟁쟁한 선수들이 “나도 할래”라고 손을 들었다. 종전 미국 야구 대표팀은 ‘내 성적이 우선’이라는 통념 속에 드림팀이라 부르기 어려웠다. ESPN의 버스터 올니는 “코로나19와 거리 두기가 오히려 야구와 팬들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19는 팬들의 비존재를 통해 오히려 존재를 증명하는 계기가 됐다. 팬들이 없으면 야구도 없다는 걸 절실하게 깨닫는 봄, KBO리그 야구와 팬들의 거리도 조금 늦어진 새봄과 함께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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