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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사라질 위기에 처한 `국보의 맏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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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의 자취28]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1970년 12월 24일은 유난히도 추웠다. 국내 불교조각 권위자 문명대 동국대 교수(현 동국대 명예교수)는 혹한의 날씨 속에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 계곡의 반고사(磻高寺) 터를 살펴보고 있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불교대중화를 이끌었던 원효대사(617~686)는 반고사에 머물면서 초장관문(初章觀文),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등을 집필했다. 그 흔적을 찾기 위한 반고사지 탐사는 1968년 9월부터 3개년간 진행됐던 울산지역 불교유적 조사의 마지막 일정으로 이뤄졌다.

태화강 상류의 대곡리 계곡에는 기암괴석의 명승지인 반구대(盤龜臺)가 있다. 거북이 엎드린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암괴석의 명승지인 만큼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등 고려, 조선시대 문인들이 찾아 많은 명시를 남겼다. 안견과 함께 '조선 2대 화가'인 겸재 정선은 반구대 산수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곳은 신라의 고도 경주와는 불과 20여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신라의 왕족과 화랑, 승려들 역시 대곡리 계곡을 찾아와 심신을 수련했고 바위 등에 수많은 명문을 조각했다. 신라사와 화랑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신라인들의 관직명, 인명, 기마행렬도, 신라 토용이 금석문과 선각화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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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새끼와 유영하는 어미고래, 포경장면, 새끼 밴 사슴 등을 세밀하고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사진은 3차원 실측도.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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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 교수는 이날 조사에서 기대치도 않았던 대행운을 건지게 된다. 반구대에서 대곡천을 따라 1.5㎞가량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지점의 절벽에서 이끼에 덮인 희미한 그림을 발견한 것이다. 각종 인물상과 동물상, 기하학적 무늬가 확인됐다. 바로 '천전리 암각화'(국보 제147호·1973년 지정)였다.

기뻐하기도 잠시, 문 교수는 주민들에게서 더욱 놀라운 얘기를 전해 듣는다. 반구대 하류 계곡에 가면 호랑이 그림도 있다는 것이다. 문 교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듬해 12월 25일 김정배 고려대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이융조 충북대 교수(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를 대동해 배를 이용해 반구대에서 1㎞쯤 하류로 내려갔다.

사연댐 초입으로 접어들었을 즈음, 오른쪽 절벽 쪽에 놀랍게도 발가벗고 손을 들고 춤을 추는 나체인과 거북, 물고기 그림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날 반구대 암각화로 잘 알려진 '대곡리 암각화'(국보 제285호·1995년 지정)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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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반구대 암각화 실제 모습. 우수기, 갈수기 사연댐의 수위에 따라 잠기고 드러나는 일이 되풀이되면서 5000년 이상을 굳건히 버텨왔던 반구대 암각화가 불과 수십년 만에 심각하게 훼손됐다.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문 교수가 1년 먼저 발견했던 천전리 암각화와 대곡리 암각화 모두를 합쳐 이르는 명칭이다. 바위에 문양을 새긴 기법과 묘사 내용이 동물을 주제로 한다는 것은 유사하지만 사실적 묘사나 규모 면에서 대곡리 암각화가 천전리 암각화를 압도한다는 평가다. 다년간 대곡리 암각화를 연구해온 변영섭 고려대 교수는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 늘 "대곡리 암각화는 우리 국보 중 맏형"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국보가 328호까지 지정돼 있지만 대곡리 암각화의 가치를 능가할 만한 국보는 없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대곡리 암각화의 크기는 넓이 10m, 높이 4m이다. 암각화는 절벽의 윗부분이 처마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그늘을 만들면서 비가 와도 아래의 암벽이 젖지 않는 구조이다. 암각화가 오랜 세월 속에서도 잘 보존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암각화는 말그대로 바위그림이다. 선사시대 거대한 바위는 신성한 장소였다. 선사인들이 자신들의 희망이 이뤄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이 암각화인 것이다. 학계는 전 세계적으로 암각화가 북방문화권의 유적이며 따라서 우리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이해한다.

절벽에는 다양한 동물상, 사냥무기와 악기 등 각종 도구상, 인물상, 기호가 새겨져 있다. 선사인들은 먹이였던 사냥감인 고래나 사슴 등이 풍성하기를 바라고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이다.

유적에서 확인되는 그림은 모두 307점이며, 이 가운데 동물상이 전체 그림에서 169점(55%)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동물 그림에서 고래가 모두 53점이다.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 등 다양한 종류의 고래가 등장한다. 세계 암각화 중 가장 많은 종류의 고래 그림이다. 또한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 배와 작살, 그물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포경 장면 등도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이 역시 세계 암각화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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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일제강점기 포경 모습. 일본인들이 동해안에서 고래를 잡아 해체하고 있다. 울산 등 동해안에는 고대로부터 고래가 흔했다. <사진제공=수원광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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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그림은 암각화 주변의 동시대 자연환경을 반영한다. 암각화가 제작되던 선사시대엔 선사시대 울산만의 자연환경은 바닷물이 태화강 중류까지 들어와 300m에 달하는 내만(內灣)이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지리학에서는 내만이 '고울산만'으로 불린다. 선사인들은 먹이를 따라 또는 안식을 위해 고울산만으로 들어온 고래를 수심이 더 얕은 곳으로 몰아 좌초시켜 효과적으로 포획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를 포함해 암각화에서는 바다거북, 바다새, 물고기, 물개로 추정되는 기각류, 상어 등 바다동물과 붉은사슴, 대륙사스, 사향노루, 노루, 고라니, 산양, 호랑이, 표범, 멧돼지, 너구리, 늑대, 여우, 산토끼 등 육지동물 등 최소 23종의 동물이 확인된다. 동물조각에서는 고래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함정에 빠진 호랑이 모습, 새끼를 밴 호랑이, 교미하는 멧돼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사슴 등을 세밀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인물상은 14점이며 벌거벗은 몸에 남근을 과장되게 새겨 넣었거나 가면처럼 얼굴만 있거나 긴 막대기를 부는 인물도 발견된다. 그 밖에 의식용, 생활용 도구그림 등이 있다. 암각화는 그야말로 경제와 생산, 식생활과 종교의식 등 당대 문화의 총체적 상징물인 것이다.

제작기법은 쪼기, 갈기, 긋기, 돌려파기 등이 사용됐으며 대체로 정교하게 패어 있다. 이는 시베리아 암각화의 전통을 보여준다. 김원룡 전 서울대 교수는 금속징과 망치가 이용됐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정밀조사 결과, 금속도구를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암각화 제작시기와 관련해서는 신석기 중기 이후부터 청동기 전반기(기원전 6000년~기원전 1500년)까지 순차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울산 황성동의 작살 박힌 고래뼈, 부산 동삼동 패총 사슴무늬 토기, 그물무늬 토기, 조개 가면, 양양 오산리 얼굴상, 통영 욕지도 패총 멧돼지 토우, 울산 신암리 여인상, 울산 세죽리 패총 물개 토우 등 암각화의 주제와 연관된 유물의 시대가 모두 신석기시대인 것이 증거로 제시된다. 울산만의 고환경 연구에서도 동일한 결론이 도출되고 있다.

지금 이 대곡리 암각화는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암각화가 발견되기 정확히 6년 전인 1965년 12월 암각화 바로 하류에 울산시민의 식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의 사연댐이 건설된다. 댐이 생긴 이후 우수기, 갈수기 댐의 수위에 따라 암각화는 수중에 잠겼다가 노출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훼손이 빠르게 진행돼 왔다. 5000년 이상을 굳건히 버텨왔던 반구대 암각화가 겨우 수십 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좀 더 빨리 암각화를 찾아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현재로서는 사연댐의 수위를 낮추는 것이 최선이지만 용수 문제를 놓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해 사태 해결은 요원하다. 울산시는 암각화를 볼모 잡아 고질적인 용수부족을 해결하려고 하며, 주변 지자체는 자신들의 물을 나눠줘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한다. 방관하던 중앙정부가 뒤늦게 중재해보겠다고 나섰지만 타결점을 찾기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에 암각화 유적이 다수 존재하지만 반구대 암각화처럼 수많은 동물을 종을 구분할 수 있게 상세히 표현한 것은 없다. 인류 최초의 고래 사냥 자취이자 북태평양의 독특한 선사시대 해양문화 유적이기도 하다. 암각화는 지역과 국가를 넘어 세계의 유산인 것이다. 정녕 우리는 이 찬란한 인류유산이 파괴되도록 놔둘 것인가.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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