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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데스크의 눈] 생사 가른 1.5mm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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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안승찬 기자] 1796년 갈라파고스 제도에 혹독한 가뭄이 닥쳤다. 식물이 말라 스러졌다. 씨앗을 먹고 사는 갈라파고스의 작은 새 핀치들을 직격탄을 맞았다. 핀치의 85%가 굶어 죽었다.

그런데 이 혹독한 시절에도 살아남은 핀치들이 있었다. 갈라파고스 핀치를 연구는 피터·로즈메리 그랜트 부부는 죽은 핀치와 살아남는 핀치의 차이를 연구했다. 무엇이 혹독한 가뭄에서도 핀치들을 살렸을까.

그랜트 부부의 조사에 따르면 살아남은 핀치는 죽은 핀치보다 부리의 크기가 평균 1.5mm 큰 것으로 나타났다. 고작 1.5mm다. 이 작은 차이가 씨앗을 조금 더 먹을 수 있는 조건이 됐고, 결국 생사를 갈랐다. <핀치의 부리>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진화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연선택의 결과다. 변화의 과정에서는 살아남는 자는 남은 씨앗을 독식하고 자손을 번성하지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1.5mm라도 달라야 한다는 건 진화의 법칙이 알려주는 교훈이다.

이데일리

갈라파고스제도에 서식하는 핀치[사진=BBC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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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없는 이사회 현주소

최근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의 이사회를 특정 성(性)의 이사로만 구성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런데 한국의 금융회사들은 변화에 못미쳐도 한참 못 미친다.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 금융회사 22개사 중에서 여성이사가 1명도 없는 곳은 신한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IBK기업은행, 삼성생명, 한화생명, 삼성화재, DB손해보험 등 17개사에 달한다. 국내 1위 금융회사인 신한금융의 경우 이사회 13명이 모두 남성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금융·삼성생명·삼성화재도 7명의 이사가 모두 남성이고, 기업은행도 이사회 6명이 모두 남성이다.

그나마 KB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 현대해상 등이 ‘남성 이사회’이라는 오염에서 벗었지만, 여성이사가 한명씩 끼어 있을 뿐이다. 다양성을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금융회사들만 탓할 일은 아니다. 2019년 1분기 기준 사업보고서 기준으로 상장법인 2072곳의 등기임원 1만2370명(사내이사 8389명, 사외이사 3981명) 중에서 여성 사내이사는 373명(4.4%), 여성 사외이사 125명(3.1%)에 그쳤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7년 연속 꼴찌다. 한국의 기업 전체가 사실상 남성 공화국이나 다름 없다.

다양성 없는 의사결정은 도박

사실 평소에는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성으로 임원 할당을 정하는 건 오히려 역차별’이란 반론도 나온다. 획일적인 제도가 꼭 바람직한 건 아니다.

하지만 다양성이 없는 의사결정은 진화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위험한 도박에 가깝다. 환경이 급변하게 되면 자칫 모든 것으로 한꺼번에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란을 모두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투자 격언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성별의 다양성이 기업 경영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도 많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에 따르면 전세계지수(ACWI)에 포함되는 회사 중 한 명 이상의 여성이사가 포함된 기업은 78.7%(2018년 기준)에 이른다.

금융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작은 차이가 생사를 가를 것이다. 1.5mm의 차이는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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