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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바야모의 노래가 처음 불리다(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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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쿠바 국가 '바야모의 노래'가 제1차 독립전쟁이 시작되던 1868년 발표됐다. 왼쪽 인물이 작사 작곡자 페드로 피게레도. uneac.org.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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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의회가 1807년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가결하면서 노예제의 황혼이 시작됐다. 유럽 기독교 역사는 저 휴머니즘의 승리를 ‘하나님의 은총Amazing Grace)’이라고 선언했다. 영국의 종교인들이 노예무역폐지협회를 설립한 것은 1780년대였고, 성공회 사제 존 뉴턴 신부가 가사를 붙인 저 찬송가를 발표한 것은 1779년이었다.

서인도 제도 트리니다드토바고 출신 사학자 겸 정치인 에릭 윌리엄스는 명저 ‘자본주의와 노예제도’에서 다르게 주장했다. 제국주의의 탐욕이 노예제를 낳았듯 폐지의 주된 동력도 세계 자본주의의 성장이라는 주장이었다. 산업혁명은 증기 기계가 노예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석탄은 노예의 몸값ᆞ밥값보다 저렴했고, 폭동을 벌이는 일도 없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설탕 산업도 점차 기계 노동에 기대게 됐다. 노예들의 식량을 값싸게 공급하던 영국 식민지 미국이 1789년 독립한 것도 변수였다. 노예제의 노을이 스페인 식민지 쿠바 아바나 해변을 물들인 것은,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한 지 71년 만인 1878년이었다.

스페인은 영국산 기계에 저항한 국가 중 하나였다. 스페인 정부는 노예제에 대한 노예들의 저항 및 백인 농장ㆍ공장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노예를 수입했다. 1856~60년 사이 쿠바의 노예는 무려 9만 명이 늘어났다. 쿠바의 설탕 공장주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가 자신들의 노예를 주축으로 스페인 정부에 맞서 벌인 제1차 쿠바 독립전쟁(1868~78년의 10년 전쟁)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 저항은 비록 실패했지만, 약 20만명의 노예의 목숨을 희생시켜 얻어 낸 약속이 노예제 폐지였다. 윌리엄스의 논리에 따르자면 그건 자본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자본’은 진보였다.

쿠바 시인 페드로 펠리페 피게레도(Pedro Felipe Figueredo, 1818.2.18~1870.8.17)가 반군의 노래 ‘바야모의 노래(El Himno de Bayamo)’의 가사를 쓴 것도 저 10년 전쟁이 시작된 1868년이었다. 반군 거점이던 동부 바야모의 전사들에게 “사슬에 묶여 사는 것은/ 치욕과 굴욕에 묶여 사는 것일지니(…) 용기 있는 이들이여 전장에 나서라(후렴 일부)”며 충동한 저 노래가 독립 후인 1902년 쿠바 국가(國歌)로 제정됐고, 1959년 사회주의 혁명 정부도 그 뜻에 수긍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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