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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멈춤 버튼 누르고 난생처음 쓴 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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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비영리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장재열 대표

2030의 불안과 무기력 그리고 번아웃 이야기

“지금 청년들 삶은 러닝머신 위를 뛰는 것과 같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뛴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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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해 서울대 입학, 40여 개 스펙을 쌓고 입성한 삼성.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던 순간 우울증을 발견했다. ‘도태되면 끝’이라는 불안과 공포를 동력 삼아 한순간도 멈춤 없이 달려와 남들이 원하는 걸 얻어냈지만 “세상이 말하는 대로 살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된 걸까?” 하는 질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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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과 대화하는 글쓰기로 해결



장재열(35)씨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상담받으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온라인에서 또래 청년들과 소통하고 교감하고 지지받은 체험은 2013년 비영리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sevenbigsisters.com) 설립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연애, 진로, 취업, 퇴사를 고민하는 3만9천여 청소년·청년을 온·오프라인에서 만나 무료로 상담했다. 2017년부터는 전국 지방자치단체와 손잡고 청년 상담가들을 양성해 지역 청년을 위한 낮은 문턱의 심리적 안전망을 구축해오고 있다. 또 서울시와 손잡고 마음건강과 관련된 공공서비스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소개해주는 유튜브 채널 ‘마음건강대백과’를 운영하고 있다.

ㅡ 현재 걷는 상담가의 길은 인생에서 예측된 일이었나.

내 진로 선택 후보 100순위를 놓고 봐도 없던 선택이었다. 올해 35살이 됐다. 학창 시절에 예상한 내 35살 모습은 프랑스 파리나 미국 뉴욕의 컬렉션에 출장 가 있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패션 마케터가 꿈이었다.

ㅡ 그럼 상담가의 길은 어떻게 걷게 됐나.

직장에서 우울증에 걸려 퇴사한 게 계기였다. 정신과에 가자니 기록에 남을까봐 두렵고, 심리상담센터에 가자니 회기당 10만원이라는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정서적으로 위기에 봉착했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인프라가 없다는 걸 느꼈다. 한국 사회에서 정신건강 위기에 처하면 고비용을 내고 정신진료 소비자가 되거나 가족이나 친구의 진을 빼가면서 하소연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상담받으면서 1년 사이 퇴직금의 절반이 날아갔다. 상담 선생님의 제안으로 블로그에 글을 썼는데, ‘나도 그렇다’고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독자가 늘어났다. 그것이 ‘좀놀아본언니들’ 설립으로 이어졌다.

ㅡ 남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왜 우울증이 생겼을까.



직장 때문에 우울증이 온 건 아니었고, 입사 때부터 이미 번아웃(탈진증후군)이었던 거 같다. 다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다. 청소년기 때부터 ‘도태되면 안 된다’는 공포가 컸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집안의 아이였고, 공부 실력도 뛰어나지 않았고, 소심하고 여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따돌림을 많이 겪었다. 공부 잘하고 잘사는 아이들이 가해 주동자였다. 그래서 그들보다 좋은 대학, 즉 서울대를 가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진로에 대한 꿈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서울대가 목표였다. 고등학교 시절, 내 성적으로는 서울대에 갈 수 없어 삼수를 했다. 당시는 서울 강남 3구 출신의 서울대 진학이 급증한 시기였다. 대학에서도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컸다. 대기업 입사를 목표로 한 학기에 각종 교육 수료증, 공모전 공모 등 스펙을 6개씩 쌓았다. 청소년기와 청년기 10년을 살아남아야 한다, 도태되면 안 된다는 불안 속에 자신을 고립시키며 미친 듯이 달리다보니 입사 이전부터 번아웃이 왔다.

ㅡ 우울증은 어떻게 치유했나.

번아웃과 고립감으로 우울증이 왔는데, 나 자신과 대화하는 글쓰기를 통해 많이 치유됐다. 나는 늘 95점을 받아도 ‘잘했다’가 아니라 ‘다음엔 100점 받아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글쓰기를 통해 내가 한 번도 나에 대해 잘했다고 인정해준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내 글에 또래 친구들이 ‘좋아요’도 눌러주고 이웃 신청도 늘고 ‘나도 비슷하다’는 피드백을 받으면서, 고립감에서 벗어나는 정서적 유대를 경험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견디며 회사에 다니는데 나만 유약해서 퇴사하고 말았다는 자기비하적 감정도 치유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알았고, 그들과 정기 모임을 하면서 단체의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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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확신



ㅡ 생존 강박으로 인한 스펙주의자였는데 가난·왕따·우울증을 공개하는 것에 저항감은 없었나.

당연히 있었다. 처음에 블로그와 포스트를 운영할 때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독자들이 나를 여자로 착각하기에 그걸 바로잡지 않고 ‘좀 놀아본 언니’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것도 영원히 신원을 공개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3년 내 네이버 포스트가 인기 상위 5위 안에 오르면서 네이버에서 공개 사례 발표를 요청했다. 고민 끝에 ‘언젠가는 밝혀질 수밖에 없겠다’ 싶어 용기 내어 나를 드러냈다. 네이버 본사 강당에서 발표하는데 덜덜 떨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웠는데, 그 과정이 굉장한 해방감을 주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흠이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나를 얕잡아보거나 가련하게 볼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공감과 이해를 받았다. 나와 화해하는 과정이었고, 심리적 치유가 되면서 나를 드러내는 것에 저항감이 없어졌다.

ㅡ 인간관도 바뀌었나.

예전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너 원래 되게 재수 없었는데 엄청 바뀌었다”고 말한다. (웃음) 과거의 나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였고,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친하게 지내다가도 경쟁이 붙으면 적이 되는 사람이었다. 경쟁에서 지면 무시당한다는 사고의 알고리즘이 강해, 경쟁심과 승부욕이 컸다. 없이 살면 무시당한다는 생각도 강해서 패션이나 외모에 집착했다. 패션은 어릴 때 ‘없이 살았던’ 아이라는 걸 감추는 도구였다. 공부, 스펙, 외모에서 20대의 나를 봤을 때 10대의 나를 유추할 수 없도록 가려야 했다. 굉장히 날이 서 있었고, 남을 포용하기는커녕 내 것 하나 양보하는 일이 강탈당한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때 타인은 모두 내 경쟁 상대였다. 퇴사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타인이 경쟁자가 아니라 지지자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을 처음 하면서 변했다. 고마움을 알게 되고 그러다보니 공생을 모색했다. 그전까지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ㅡ 가난, 왕따 등에 따른 낮은 자존감은 많이 회복됐나.

청소년기에는 누가 봐도 자존감이 낮았고, 대학 시절과 취업준비생 시절에는 자존감이 높은 척하는 자존감이 낮은 아이였다. 대학도 직장도 자존감을 회복시켜주진 않았다. 직장을 그만뒀을 때도 ‘돈을 못 버는데 어떻게 살지?’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먼저 고민했다. 하지만 내 외피가 다 사라진 상태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지지받고 인정받는 체험을 하니 ‘내가 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다. 사람들이 내 소득, 명함보다 나라는 사람과의 교감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걸 깨달으면서 나를 꾸미지 않게 됐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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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나지 않기 위해 뛰는 사람들



ㅡ 상담하는 게 어떤 보람이 있을까.



3~4년차까지는 보람을 많이 찾으려 했다. 지금은 보람으로 이 일을 하면 오래 못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100명을 상담하면 3명 정도가 고맙다고 하거나 후일담을 들려준다. 2명 정도는 무료 상담인데도 “왜 이것밖에 못 해주나”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불만을 제기한다. 경제적 보상 없이 보람 하나로 하는 사람은 그런 반응에 상처받고 실망할 수밖에 없다. 보람이 아닌 책임감으로 해야 오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건강, 청년들의 자기 돌봄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지방자치단체 등 행정 영역에서도 청년 복지를 실천한 데는 우리 활동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정신과의사, 심리상담사 외에 제3의 영역이 형성되는 사회적 흐름에 우리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기에, ‘나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접을래’ 하는 것은 사회적 도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ㅡ 남의 하소연과 고민을 듣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결하나.

몸과 마음의 건강은 뗄 수 없는 관계다. 마음의 스트레스를 신체를 돌보는 행위로 풀고 있다. 등산, 운동, 채식 등 건강한 음식 먹기, 목욕 등을 통해 생각을 잠깐 멈출 수 있다. 지난해부터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결합하는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있다.

ㅡ 요즘 젊은이들의 정서에서 가장 큰 특징이 뭐라고 보나. 과잉 불안인가, 무기력인가, 아니면 선택장애인가,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인가.

불안이 엄마이고, 나머지가 그 산물들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불안하니까 숨어버리는 무기력이 생기고, 선택장애가 온다. 어떤 선택을 했을 때 큰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한다. 그 불안의 기저에는 뒤처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래서 지금 청년 세대는 러닝머신 위에서 뛰는 사람들과 같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뛰는 사람과, 밀려나지 않기 위해 뛰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은 상반신 사진만 찍는다면 뛰는 모습이 똑같다. 하지만 그들이 뛰는 기저는 다르다. 상담해보면 점점 밀려나지 않기 위해 뛰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 불안이 결국 번아웃 혹은 선택장애, 정신장애를 만드는 기제가 된다.

ㅡ 도태에 대한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회에 진입하는 통로가 좁아졌고, 사회안전망도 없고, 그렇게 좁은 문을 통과했음에도 내년과 내후년에 내 삶이 질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박탈됐다. 부모 세대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가난했지만 5년 뒤, 10년 뒤, 아이들이 다 컸을 때는 지금보다 풍족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사람은 희망으로 불안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는데, 희망은 줄고 불안은 가중되니 요즘 세대는 이전 세대와 살아가는 모습이나 정신적인 기본값이 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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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ㅡ 지금 가장 큰 화두와 고민은 무엇인가.

낮은 문턱과 안전망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정신과나 심리상담센터를 대체하는 게 아니다. 우리 역할은 게이트웨이(관문)다. 사람들은 아직 자신의 정서적 문제를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우리는 그걸 꺼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극도로 고립된 사람을 관계망 안으로 들여와서 자기 고민을 말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만들어도, 그 사람은 다음 단계에서 전문가를 만나면 훨씬 많이 좋아질 수 있다. 경제적으로 전문가에게 연결되기 어려운 사람에겐 공공행정 영역이 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한다.

2017년부터 우리 팀이 서울, 대전, 울산, 경상남도 등 지방자치단체 7곳과 협업해 각 지역에서 청년들을 선발해 또래 청년을 상담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 이들이 지역의 사각지대에 있는 청년들을 발굴하고 만나고 기초적인 마음건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심각한 친구들은 전문가와 연결해주는 역할까지 하도록 양성했다. 전국에 거부감과 낙인효과 없이 문턱이 낮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집 근처에 심리적 안전망을 만드는 것을 지향한다.

ㅡ 인생에서 목표하는 바는 무엇인가.

흐르듯이 살았으면 한다. 이미 20대 후반에 직업적 목표로 그렸던 상이 완전히 전복되는 경험을 해서 지금 미래에 무얼 하겠다는 구체적인 모습은 없다. 일단 40살까지는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할 계획이다. 전국 지자체에 청년들에 대한 심리적 안전망이 잘 안착하면 우리 팀은 멋지게 해산하거나 후임 대표에게 단체를 물려주고 싶다.

ㅡ 지금 행복한가.

나는 평생 남 앞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써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언론 인터뷰에서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행복하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살고 있어요”라며 에둘러서 답했는데, 한 달 전 송년회 때 난생처음 남들 앞에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우울증이 재발할 조짐이 있어, 몇 개월 동안 일을 중단하고 고향의 부모님 집에서 쉬었다.

글쓰기나 단체활동을 통해 내면의 두려움이 많이 치유됐지만, 그래도 기저에 여전히 남아 있는 두려움으로 인해 ‘멈춤 버튼’을 누르는 게 힘들었다. 쉬면 일이 끊기지 않을까, 잊히지 않을까 등의 두려움으로 약을 먹고 버티며 일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멈춤 버튼을 누르고 나를 돌보는 선택을 했다. 경이롭게도 일이 사라지거나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았다. 다들 나의 멈춤과 쉼을 지지해줬을 뿐 아니라 기다려줬다. 나를 돌보느라 동굴에 들어가도 삶에서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두려움이 사라지니까 그게 행복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앞으로도 상황은 여러 번 나빠질 수 있겠지만 이제는 비상연료통을 들고 항해하는 기분이다. 내가 행복하다는 말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웃음)

김아리 객원기자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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