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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박완서가 등단작 ‘나목’을 특별히 편애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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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등단작 장편 ‘나목’부터

2010년 마지막 책 ‘…아름답다’까지

박완서 서문·후기 모음 ‘…모든 책’

작품배경과 사회상, 문학관 등 담아

“시대를 증언하고자 몸부림친 흔적”

속물근성 비판과 페미니즘 목소리도


한겨레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작가정신·1만4000원

“왜 꼭 빤한 작가 서문이라는 걸 써야 되는지, 그 부담감이 소설 한 편 만들기보다 훨씬 괴롭다.”

1998년에 낸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의 서문에서 작가 박완서는 이렇게 썼다. 서문 쓰기의 괴로움을 토로한 서문인 셈이다. 그런데, 얄궂어라, 작가의 괴로움이 거꾸로 독자의 기쁨이 되는 이치라니.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쓴 서문일수록 독자는 즐겁게 읽게 되니 말이다. 작가 나이 육십대 후반에, 자신과 비슷한 또래 이야기를 주로 쓴 이 책을 두고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늙은이 너무 불쌍해 마라,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은 박완서의 첫 소설 <나목>(1970)에서부터 마지막 책인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2010)에 이르기까지 생전에 그가 낸 책들에 작가가 직접 쓴 서문과 후기를 한데 모은 책이다. 한 작가의 서문과 후기만을 모은 선행 사례로는 평론가 김윤식의 <김윤식 서문집>과 이생진 시인 서문집 <시와 살다>가 있었다. 박완서는 독자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작가였고 그의 책들은 출판사를 바꿔 가며 되풀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그렇게 출판사가 바뀌어 다시 나올 때마다 작가가 새로 붙인 개정판 서문과 후기도 살뜰하게 챙겨 실었다.

“나는 처녀작 <나목>을 사십 세에 썼지만, 거의 이십 세 미만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썼다고 기억된다.”

1970년 잡지 <여성동아> 장편 공모 당선작이었던 <나목>을 1976년에 다시 내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목>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서로 다른 출판사를 통해 나왔는데, 1985년판에 붙인 후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요새도 나는 글이 도무지 안 써져서 절망스러울 때라든가 글 쓰는 일에 넌더리가 날 때는 <나목>을 펴보는 버릇이 있다. 아무 데나 펴들고 몇장 읽어 내려가는 사이에 얄팍한 명예욕, 습관화된 매명으로 추하게 굳은 마음이 문득 정화되고 부드러워져서 문학에의 때묻지 않은 동경을 들이킨 것처럼 느낄 수 있으니 내 어찌 이 작품을 편애 안 하랴.”(1985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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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작가에게 첫 책이 대체로 그렇겠지만, 박완서에게 <나목>이 지니는 의미는 거의 종교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이게 늦은 나이에 쓴 등단작이자 애틋한 청춘 시절 초상이 담긴 자전적 작품이니 그럴 법도 하다. <나목>에 관한 언급은 1977년에 낸 소설집 <창밖은 봄> 서문에도 나온다. 여기에는 작가 자신이 작성한 연보가 붙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작가는 본래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내고자 화가 박수근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쓰기 시작하고 보니, 사실을 증언해야 하는 논픽션에서 나는 자주자주 거짓말을 시키고 있었고, 거짓말을 시킴으로써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이상심리’야말로 소설가에게 필요한 소질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내가 거짓말의 유혹에 넘어간 게 아니라, 허구로써 오히려 내가 그리고자 하는 인물을 진실에 가깝게 그릴 수 있다는 소설의 초보를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서문과 후기는 작가와 작품의 탄생 배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면서 소설과 문학의 속성, 작가 및 작품과 사회의 관계 등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하나뿐인 오빠의 죽음을 초래한 6·25 전쟁은 작가의 삶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고 결정적으로 그를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등단작 <나목>과 이상문학상 수상작 ‘엄마의 말뚝 2’, 연작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을 통해 그는 줄기차게 전쟁이라는 괴물과 문학적 대결을 펼쳤다. 이 작품들보다 덜 알려진 초기 장편 <목마른 계절>(1978)의 1987년 개정판 후기에서 그는 자신의 소설 쓰기가 ‘증언’에의 욕구에서 비롯했음을 이렇게 밝힌다.

“그때 내가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로 그래, 언젠가는 이걸 소설로 쓰리라, 이거야말로 나만의 경험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 상상력이 먹혀들 여지가 없을 만큼 그 시절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끔찍하기도 했지만, 나 혼자만 보고 겪은 사실에 대한 두려움과 책임감이 소설에 대한 욕심보다는 증언 쪽에 더 중점을 두게 했다.”

그가 ‘증언’을 향한 의무와 욕구를 밝힌 대상이 전쟁의 참혹함만은 아니었다. 소설집 <꽃을 찾아서>(1986)의 1996년 개정판 서문에서 그는 “내 글에서도 어떡하든 그 시대를 증언하고자 몸부림친 흔적이 도처에 비죽비죽 드러나 있었다”고 썼다. 그런가 하면 신문 연재 장편인 <휘청거리는 오후>(1977) 후기에서는 “부자도 가난뱅이도 아닌 보통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과 양심의 몰락을 통해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정직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을 뿐”이라는 말로 비속한 세태와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겨냥했다.

여성 문제를 선구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 장편 <살아 있는 날의 시작>(1980) 후기는 페미니즘의 시대인 지금 읽어도 유효하게 들린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억누르는 온갖 드러난 힘과 드러나지 않은 음모와의 싸움은 문학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이런 억압의 관계만은 별로 문학의 도전을 안 받으면서 보호 조장돼왔던 것 같다. 도전은커녕 그런 관계를 비호하고 미화하는 것들 편에 섰다는 혐의조차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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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마지막 소설집이었던 <친절한 복희씨>(2007) 후기에서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라는 말로 독자를 웃겼던 박완서는 숨지기 한 해 전에 낸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이렇게 썼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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