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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소비자가 봉이냐"...설 앞둔 마트는 '포장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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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 ‘No 테이프·끈’ 제도 시행 첫 설
소비자들은 여전히 ‘우왕좌왕’
"취지는 공감하지만, 왜 소비자가 피해보나"
전문가들 "대체품이나 인센티브 제도 필요"

"여보. 무거워서 짐이 쏟아질 것 같은데, 박스 아래쪽 좀 잡아봐."

지난 22일 오후 7시 설 명절을 앞둔 서울 강남구의 한 주차장. 구입한 물건을 박스에 담고 차로 이동하던 한 남성이 다급하게 부인을 찾았다. 무거운 짐 때문에 박스의 아랫부분이 볼록하게 벌어지는 상황. 당황한 부인이 손으로 받친 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차로 향했다. 남편의 입에서는 "도대체 테이프는 왜 없앤거야"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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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한 대형마트에서 손님들이 박스를 직접 접어 구매한 상품을 담고 있다. 자율포장대에서는 테이프나 플라스틱 노끈이 사라졌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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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은 대형마트 자율포장대의 ‘테이프·노끈 제공 금지’ 이후 첫 명절을 맞아, 서울 시내 대형마트 6곳을 관찰해봤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3사는 지난 1일부터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자원재활용법) 개정안 시행으로 환경부 자율협약을 맺고, 포장대에서 테이프와 노끈을 없앴다. 당초 박스도 없애겠다고 결정했지만, 소비자들의 항의가 잇따르면서 박스만 남겨뒀다.

제도 시행 3주가 지났지만, 포장대 앞은 한마디로 ‘우왕좌왕’이었다. 포장대 벽면에는 ‘테이프와 끈 사용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걸려있었지만, 홍보부족으로 제도 시행을 알고 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설 연휴로 물품 구입이 많았던 일부 소비자들은 아무 ‘끈’이라도 달라며, 직원들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설 연휴를 맞아 서초구의 마트를 찾았다는 한 가족은 자율포장대 앞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산 물건을 담을 장바구니를 구입할지, 테이프를 사서 박스에 포장해갈지를 고민 중이었다. 50대 김모씨는 "가족들과 상의 끝에 테이프를 직접 구입해 박스로 포장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환경을 위한 취지에 동감하지만, 요즘 잘썩는 친환경 소재들도 많은데, 아예 없애는 것보다는 대체품을 사용하면 좋겠다"고 했다.

짐이 무거워 물건이 박스 밑으로 쏟아진 소비자들도 있었다. 마트를 찾은 한 60대 남성은 "이게 무슨 탁상행정인지 모르겠다"며 "환경을 위한 취지면 애초에 제조나 유통 과정에서 플라스틱 포장을 줄이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다. 박스만 봐도 테이프가 붙어있는게 보이는데, 왜 소비자들이 피해보게 하는 지 모르겠다"고 소리쳤다.

직접 테이프를 붙인 박스를 들고 온 경우도 있었다. 노원구의 대형마트를 찾은 권영우(62)씨는 "아들이 아예 박스를 챙겨가라고 말해서 들고 왔다"며 "설 연휴 앞두고 장을 평소보다 엄청 많이 봤는데, 박스를 안 챙겨왔으면 난감할 뻔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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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찾은 서울 서초구의 한 대형마트에는 여전히 박스 포장을 위한 테이프가 비치돼 있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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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사례가 잇따르던 대형마트 3사와 달리, 농협하나로마트의 포장대는 평화스러운 모습었다. ‘뿌지직’ 포장대에서 테이프를 뜯는 소리도 여전했다. 마트 관계자는 "테이프·노끈 제한은 자율 협약이라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업체들마다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설 명절을 맞아 장을 보러왔다는 김인숙(45)씨는 "쇼핑백을 가져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물품을 많이 사서 걱정이다"며 "다른 마트와 달리 박스 포장용 테이프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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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 자율포장대에 쌓여있는 종이 박스에 테이프가 그대로 붙어있는 모습(왼쪽)과 마트에서 구입한 물품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한 고객의 모습.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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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전문가들은 대체품이나 제도 정착을 위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의 구매 형태가 온라인으로 옮겨가면서 유통 업체들은 배송을 위해 비닐 등을 포장에 활용하고 있다"면서 "환경을 위해서라면 소비자가 다소 불편해도 양보할 수 있지만, 오프라인에서만 규칙을 두는 것은 소비자의 편익을 해치고 불편을 가중하는 조치"라고 했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환경오염을 줄이겠다는 취지는 공감하고, 소비자들도 이런한 움직임에 다들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면서도 "다만 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취지에 대한 홍보를 강화하고 인센티브 제도 등 시행초기에는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캠페인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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