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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단독] 밤톨이 엄마의 가습기살균제 울분 “죽은 아이 탯줄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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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사례집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출간

사참위, 피해자 12명 인터뷰 통해 정부에 대한 불신과 울분 담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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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민정씨는 연달아 두 자녀를 잃었다. 2005년 둘째 ‘밤톨이’는 임신 28주 때 유산했다. 2006년 셋째 동영이는 생후 4개월만에 호흡곤란 증세로 세상을 떠났다. 권씨는 2004~2007년 옥시싹싹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자녀 둘의 의료기록이 담긴 서류 수백장을 정부에 제출했다. 밤톨이는 가습기 살균제 노출 사실이 확인됐지만 판정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동영이는 ‘폐렴에 의한 사망으로 특별구제’ 판정을 받았을 뿐이다. 권씨는 옥시 불매 운동을 하러 갈 때마다 동영이의 탯줄을 주머니에 넣고 간다. 권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포기를 강요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2.

우울증을 앓고 있는 김현정(가명)씨는 증세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피해 접수를 신청했다. 자궁 난소 관련 수술만 네 차례 했고, 온몸의 연골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폐 질환이 아니어서 관계가 없다”는 정부 답변이 돌아왔다. 김씨는 자신과 주변의 피해자들이 모두 울분에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 21일 열린 피해자 비공개 간담회에서 “다 필요 없다. 판 사람과 이상 없다는 의사, 허가 내준 사람 모두 한곳에 몰아넣고 한달만 가습기 살균제 써보게 하자”며 “나중에 죽으면 해부하는 데라도 내 몸을 맡겨서 어디까지 피해를 입었는지 꼭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고립과 불안, 불신에 시달리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피해 기록이 발간됐다.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는 지난달 31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12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바탕으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사례집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발간했다. 황전원 사참위 지원소위원장은 피해사례집 서론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통해 참사 원인과 피해 실상을 기억하고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보다 강하게 촉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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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한겨레>가 입수한 피해사례집을 보면,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을 토로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김선미씨는 “정부가 처음 제품을 허가해줄 때는 무지했다고 치자. 그러나 현재는 그 제품이 유해하다는 걸 명확하게 알고 있다”며 “알면서도 정부가 뒷짐 지고 있으면 잘못이고 악의이며 고의”라고 말했다.

사회의 무관심에 울분을 느낀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옥시 사옥 앞에서 꾸준히 시위한다는 추준영 ‘가습기 아이 피해자’ 대표는 “피켓을 들고 서 있으면 사람들이 ‘저거 해결된 거 아니야?’라고 말한다”며 “어떤 사람은 (시위를 위한) 천막이 얼마나 걸리적거리고 신경질 나는지 아느냐고 말했다. 화가 나고 처참하다”고 말했다.

실제 2018년 사참위 의뢰로 한국역학회가 주관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정 실태조사’ 연구를 보면, 가습기 살균자 피해자들의 중증도 이상의 울분은 일반인보다 2.27배 높다. 또한 약 66%의 성인 피해자가 만성적 울분 상태를 나타냈다. 연구에 참여한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피해사례집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은 전 세계가 주목할만한 유례없는 사회적 울분의 사례”라며 “피해 입증책임이 개인에게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없게 하는 사회 대응이 울분의 원인이다. 세상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린 이들을 어떻게 도울지 사회가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참위 자료를 보면,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사용한 사람은 약 400만명이고 피해 경험자도 49만~56만명에 달한다. 1월10일 기준으로 정부에 피해를 신고한 이는 6715명 뿐이고 이 가운데 1518명이 숨졌다. 정부가 피해를 인정해 구제급여를 지원한 대상자는 895명(중복 포함)이고 특별구제계정으로 지원한 대상자는 2144명이다.

최근 ‘민생법안’ 198건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가해 기업의 입증책임을 늘리고 피해자에 대한 추가 지원 내용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 개정안은 여전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다.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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