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이기수 칼럼]설 대화의 7대 금기 인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넉달 전 끔찍한 추석이었다. 저녁상을 일찍 물리고서다. “그 놈아 참 못쓰겠더만.” 공기업 다니는 큰형(59)이 TV를 가리켰다. 사흘 전 대통령이 임명한 조국 법무부장관이 보였다. “아따 못쓰긴 뭐가 못써요. 형도 저런 종편이나 유튜브만 보지 말라니까.” 구보씨(54) 목소리가 커졌다. 막 데친 김치전에 두세 잔 돌던 술상이 얼어붙었다. 서울·대전의 집값 얘기를 주고받다 TV 틀자마자 조국 얘기로 불똥이 튄 것이다. 만두를 빚던 형수와 아내도 놀라 부엌에서 나왔다. 조국 퇴진(큰형)-중립(형수)-검찰개혁(구보씨 부부). 1대 1대 2로 시작된 말싸움은 “아주버님도 ‘개독’ 페친들 끊으세요”란 아내 말에 교회 다니는 형수가 “왜 동서 그런 말까지…”라고 발끈하며 2대 2가 됐다. 늦게 도착한 둘째형이 말리지 않았으면 험한 말이 더 날아다녔을 터다. “여까지 하자.” 큰형이 방으로 들어가도 집안 공기는 풀리지 않았다. 늘 추석날 오전 11시 즈음,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이 밀리기 전 형집을 나섰던 구보씨는 아침 차례상만 마치고 바로 귀경길에 올랐다. 추석 뒤 시작된 광화문-서초동의 ‘조국 대전’을 50대 형제가 먼저 치른 격이다. 그 뒤 둘째형 중재로 언성 높인 걸 풀었지만, 설 귀향을 앞둔 구보씨는 아직도 추석 전날의 악몽이 생생하다.

경향신문

# 나무씨(22)는 열흘 전 다툰 남친과 서먹서먹하다. 남친은 진보정당, 나무씨는 “잘하는 정책도, 못하는 정책도 있다”고 보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다. 평소 술잔을 기울여도 정치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날의 말다툼은 ‘공무원시험에 1% 군가산점을 주겠다’는 보수정당의 총선 공약을 두고 벌어졌다. “그게 될 수 있을까.” 남친은 긴가민가했고 나무씨는 “그건 성차별”이라고 받아쳤다. 불씨는 또 페미니즘으로 옮겨붙었다. 나무씨는 그날 밤 오빠와 얘기하다 알았다. 남친과 둘이서 여초·남초 커뮤니티의 대리전을 치렀다는 것을…. 평소 정치·사회 뉴스도 커뮤니티에서 접하고 댓글까지 다 읽어보며 판단하던 두 청년의 관성이 맞부딪친 날이었다.

두 토막 모두 근래 들은 얘기다. 그 말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모두 끄덕인 게 있다. 심해져가는 ‘확증편향(Confirmatory Bias)’이다. 이 심리학 용어는 자신의 신념에 맞고 유리한 정보·증거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반대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이라고도 한다. 케이크 위에서 달콤하고 비싼 체리만 빼먹는다고 해서…. 어느 쪽이든, 한국 사회는 이미 걱정 수위를 넘어섰다. 이리저리 갈려 얼굴 붉히는 이슈는 줄잇고, 페이스북·트위터·커뮤니티의 ‘끼리끼리 친구’도 벽으로 굳어져 가는 까닭이다. 유튜브·포털의 알고리즘도 즐겨 찾는 콘텐츠만 계속 모아주면서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키우고 있다. 동서양의 실험·조사에서 확증편향의 포로가 되기 쉬운 1순위로는 전문가들이 지목된다. 자기확신이 강하고 오피니언 리더 위치에 곧잘 서는 논객·법관·정치인·종교인·학자·교사 부류다. 소셜미디어와 1인미디어가 팽창하면서 멘토(조력자)·멘티(피조력자)의 전통적 경계선과 주도권도 무의미해졌다. 멘토 머리 끝에 올라가 있는 멘티가 많고, 정치인·지식인 인기도 멘티의 입맛 따라 조변석개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명절에 가족·친지가 충돌하는 건 우리만의 일도 아니다. 작년 11월 말, 트럼프 대통령 탄핵 이슈가 불거진 미국 추수감사절 앞에 언론들은 ‘가족 간 다툼을 피하는 방법’을 앞다퉈 내놓았다. 미국 심리학회는 ‘까다로운 가족 간 대화’ 지침까지 발표했다. 트럼프시대에 미국인 39%가 정치 문제로 가족과 다퉜고, 그중 3분의 1은 절연했으며, 정치적 견해가 같거나 다른 가족의 저녁식사 시간이 1시간이나 차이 난다는 통계도 나온 터였다. 미국 전문가들이 말한 명절 다툼 예방법은 한국에도 유효하다. ①입에 올리지 않을 정치인을 함께 정하라 ②민감한 정치 얘기를 꺼내면 화제를 돌려라 ③이른 아침이나 행사 직전엔 설전을 자제하라 ④내가 타인의 견해를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라 ⑤인신공격은 하지 마라.

23일 대전 귀향길에 오른 구보씨와 통화했다. 그는 과거의 명절 금기어가 청년들의 취업·결혼·출산이라면, 지금은 정치와 페미니즘이 더해졌다고 했다. 총선 목전의 설이다. 그는 큰형과는 다투지 않기로 했고, 선 넘을 조짐만 보이면 아내에게 팔을 잡으라고 했다. 그가 가족 간 호불호가 크게 갈려 피하겠다고 꼽은 이름은 7명이다. 문재인·황교안·조국·윤석열·추미애·유시민·진중권…. 그러면서도 TV 뉴스를 켜면 맘먹은 대로 될진 모르겠다고 했다. 구보씨만이 아닐 게다. 모두를 위해, 가족의 ‘설 평화’를 위해 굿 럭!

이기수 논설위원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신문 최신기사

▶ 기사 제보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