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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123층 월드타워까지… 맨손으로 ‘롯데 왕국’ 일궈 재계 5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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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심취 문학도, 女주인공 이름서 ‘롯데’ 따와

식품사업 日서 성공ㆍ귀국… 외자도입 특혜 속 유통ㆍ관광ㆍ화학 뻗어

“자수성가” “황제경영” 갈려… ‘왕자의 난’ 두 아들 화해 못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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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 가계도. 그래픽=김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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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별세한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식품에서 시작해 유통, 관광, 석유화학 분야까지 섭렵해 대기업으로 키워낸 국내 1세대 기업인이다. 이 과정에서 롯데그룹을 진두 지휘한 기간만 70년에 가깝다. 자수성가형으로 많은 업적도 남겼지만, 배임과 횡령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기도 했다. 말년엔 두 아들의 경영권 분쟁 속에 자신이 일군 회사에서 해임되는 등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일본 오일 사업 실패 후 비누로 재기

신 명예회장은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산시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 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성공을 향한 열망이 컸던 청년 신 명예회장은 아내(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의 어머니인 고 노순화 여사)를 남겨둔 채 1942년 일본에 건너가 신문·우유 배달 등으로 고학 생활을 시작했다. 와세다대 화학공학과 야간부를 다니다 성실과 신용으로 ‘조선인’이란 불리함을 극복한 가운데 평소 그를 눈 여겨본 한 일본인의 출자로 1944년 오일 제조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때문에 공장은 가동도 못 해보고 폭격을 맞아 잿더미로 변했다.

2년 뒤 신 명예회장은 허물어진 군수 공장에서 다시 비누 회사를 차렸다. 생활용품이 부족했던 전후 시기의 특수 덕분에 그는 재기에 성공했다. 신 명예회장은 이어 당시 주일미군이 씹던 껌에 주목했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이었던 탓에 신 회장이 만들었던 풍선껌은 일본 어린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면서 히트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풍선껌 성공을 발판으로 1948년 신 명예회장은 종업원 10명과 함께 자본금 100만엔으로 법인 사업체를 설립하고 ‘롯데’ 시대를 열었다. 롯데란 이름은 괴테의 소설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인 샤롯데에서 따온 것이다. 신 명예회장은 이후 저서 ‘신격호의 비밀’에서 “내 일생일대 최대 수확이자 걸작 아이디어”라며 롯데라는 이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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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일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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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 세운 롯데 왕국

1965년 한·일 수교로 양국간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자 신 명예회장은 1967년 한국으로 돌아와 롯데제과를 설립, 본격적인 ‘한국롯데’ 시대도 열어갔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외국인투자기업에 최소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는 외자도입특례법을 제정하면서 재일교포가 이끄는 롯데에 파격적인 특혜를 제공했다. 이후 1973년 롯데가 호텔을 짓기 위해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부지를 매입할 때도, 1980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산업은행을 사들일 때도 정부의 특혜 시비는 계속됐다.

관광산업에 대한 의욕 또한 넘쳤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뤄야 한다”는 신 명예회장은 확고했다. 1973년 서울 소공동에 호텔롯데를 세우고, 1988년엔 잠실에도 호텔을 개관했다. 그는 일본롯데에서 번 돈을 호텔롯데를 통해 국내에 대거 투자했다. 호텔롯데의 대주주가 일본롯데홀딩스인 것도, 롯데지주가 생기기 전까지 호텔롯데가 지주회사 역할을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123층으로 완공된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는 신 명예회장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계속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냐”며 “세계에 자랑할 만하고 후세에 길이 남을 수 있는 건축물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화학과 식품 사업에서도 탁월했다. 신 명예회장은 1976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에 이어 1978년 삼강산업(현 롯데푸드)과 평화건설(현 롯데건설)를 인수했고, 롯데햄·롯데우유(현 롯데푸드)를 설립하는 등 파죽지세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어 1979년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을 준공, 국내에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통산업을 선점했다. 롯데는 1983년 24개 계열사에 2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한국 10대 재벌그룹로 급성장했다.

◇폐쇄경영∙왕자의 난에 발목 잡힌 말년

맨손으로 시작해 한국과 일본에 ‘롯데 왕국’을 세웠지만, 무한증식을 가능케 한 폐쇄적 경영에 대해 재계 안팎에서 많은 비판도 쏟아졌다. 그는 기업공개(IPO)를 극도로 꺼리면서 일부 회사를 빼곤 비상장 상태를 유지했고, 일본 롯데 계열사는 아예 한 곳도 상장하지 않았다. 현재 롯데지주와 함께 그룹의 한 축을 이루면서 중간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는 호텔롯데의 경우도 여전히 비상장 기업이다.

그룹 성장을 화려하게 주도했던 것과 달리, 신 명예회장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2015년 후계 구도에서 밀린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아버지를 등에 업고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롯데 왕자의 난’은 치명상으로 남았다. 왕자의 난에서 차남인 신 회장이 승기를 잡으면서 신 명예회장은 결국 자신이 일군 롯데의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해임됐다. 두 아들의 화해를 끝내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건 신 명예회장에게 큰 한이 아닐 수 없다. 신 명예회장은 두 아들과 함께 경영비리 혐의로 2017년 12월 징역 4년 및 벌금 35억원을 선고 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은 면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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