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9 (화)

83엔 들고 일본行…65년 모국 돌아와 `기업보국` 기틀 다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신격호 명예회장 별세 ◆

매일경제

젊은 시절의 신격호 명예회장. [사진 제공 = 롯데]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업은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 기업 경영이 곧 삶 그 자체다."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에게 롯데는 인생의 전부였다. 일본 유학 시절 세운 작은 식품업체를 시작으로 기업 경영에 나선 신 명예회장은 한일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 대기업을 일궈내면서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가로 평가받고 있다.

음력 1922년 10월 4일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난 신 명예회장은 항상 배움을 열망하던 청년이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풍부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그리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한 일본인 교사가 들려준 신문물 이야기는 그가 20대 초반이었던 1942년 부관(釜關)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단돈 83엔을 들고 도쿄로 건너가 신문과 우유 배달로 틈틈이 모은 돈으로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학) 화학과에 진학해 고학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조선인이라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배달 시간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성실함으로 일본인의 신뢰를 얻었다.

매일경제

1965년 귀국하는 신 명예회장(오른쪽 첫째). [사진 제공 = 롯데]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의 성실함을 높이 산 일본인 사업가로부터 5만엔을 빌려 1944년 도쿄 인근에 윤활유 공장을 세웠지만, 그 공장은 미군의 폭격으로 가동도 하기 전에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신 명예회장은 굴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1946년 학업을 마친 신 명예회장은 도쿄의 한 군수공장 기숙사 자리에 화장품 공장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히카리(光)특수화학연구소'라는 이름의 회사는 전쟁이 끝나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미(美)를 추구하려는 일본인들 본능을 자극했다.

매일경제

롯데호텔 설립 추진을 놓고 회의 중인 신 명예회장(왼쪽 첫째). [사진 제공 = 롯데]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신 명예회장이 사업가적 재능을 발휘한 것은 껌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껌을 보고 직접 만들어 팔겠다고 결심했다. 그때까지 서구 문명의 상징이었던 껌에 대한 일본인들의 거부감은 상당했다. 껌을 만드는 회사에는 비난이 쏟아졌다. 성공을 바라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판 속에서 신 명예회장이 껌을 놓지 않았던 것은 껌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어린이들이 주요 고객이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성인들의 비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풍선껌 사업을 강화했다. 어린이들 관심을 얻을 수 있도록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했다. 전쟁 후 변변한 장난감이 없었던 시대에 롯데 풍선껌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껌이라는 상품이 단순히 식품이 아니라 입을 즐겁게 해주는 장난감이라는 핵심 가치를 신 명예회장은 간파한 것이다.

껌 사업을 통해 큰돈을 번 그는 1948년 껌을 주력 사업으로 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때 만든 이름이 '롯데'다. 유년 시절 문학에 심취했던 신 명예회장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주인공 샤를로트(Charlotte)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기업 경영 체제를 갖춘 롯데는 껌 판로를 일본 전역으로 확대했고 창업 5년 만에 일본 풍선껌 시장을 석권했다.

매일경제

가족과 단란한 모습의 신 명예회장(왼쪽 둘째). [사진 제공 = 21세기북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업은 성공가도를 이어갔다. 동시에 한국 국적인 그의 성공에 시기와 차별 대우도 커져갔다. 하지만 신 명예회장은 일본으로 귀화하기를 거부하고 고향인 한국 땅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업을 통해 국가와 국민에게 이바지한다는 의미인 기업보국(企業報國)을 기치로 폐허가 된 조국에 풍요로운 희망을 주는 것이 꿈이었다. 그의 목표는 1965년 양국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40대 중년이 돼 모국으로 돌아온 신 명예회장은 당초 제철이나 석유화학 분야에 투자해 국가경제 기틀을 다지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철사업 국유화로 상황이 여의치 않자 1966년 롯데알미늄과 1967년 롯데제과 창립을 통해 본격적으로 한국 사업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에서 성공한 식품사업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장기이기도 했다. 제과에 이어 롯데삼강(현 롯데푸드), 롯데리아(현 롯데GRS) 등 식품 계열사를 잇달아 설립하면서 국내 대표 식품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매일경제

신 명예회장의 꿈은 먹거리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볼거리와 살 거리, 놀 거리를 늘려 관광산업과 연계하는 것이 국가경제 성장동력 창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1979년 개점한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는 국내 쇼핑문화를 바꾸고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도화선이 됐다. 이후 호텔, 백화점, 실내 테마파크 등이 한곳에 마련된 잠실 롯데월드는 대표적인 여가시설로 자리 잡았다.

롯데월드타워는 신 명예회장의 사업적 수완에 상상력이 더해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백화점과 쇼핑몰, 호텔 등 대규모 사업을 하나로 묶는 '복합단지' 개념은 구상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무모한 모험이라는 우려가 쏟아졌지만 신 명예회장의 뚝심으로 도시 지형을 바꾸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서울 소공동 롯데타운, 잠실 롯데월드타워 등 롯데의 복합 단지화 전략은 한 지역에 같은 브랜드 점포를 연계하면서 사업의 시너지 효과를 높였다. 쇼핑, 관광, 숙박,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편의성이 높은 매력적인 장소를 만들었다. 신 명예회장의 상상력이 뚝심으로 실현된 성공적인 사업 사례로 꼽히고 있다.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짝수 달에는 일본에서 그룹을 경영해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국내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훈했다.

[박대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