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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한겨레 프리즘] 검찰의 건투를 기원한다 / 김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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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완 ㅣ 24시팀 기자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어떤 문장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낼 때가 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 문장에는 1987년 1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 열사의 죽음 외엔 어떤 ‘사실’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 당대의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진실’을 드러냈다. 사실을 외면한 문장은 아주 잠시 당대의 폭력을 은폐했지만, 진실은 결국 얼굴을 드러내 국가 폭력을 고발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같은 문장은 또 어떤가. 2005년 한 아이돌그룹 멤버가 음주운전 사고를 사과하며 한 말이다. 이는 절반의 사실을 얘기했지만, 결과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한 경우다. 뜨거우면서 차갑고, 부드러우면서 딱딱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정치 개입은 했지만 선거 개입은 하지 않았다’거나 ‘공문서 위조를 했지만 간첩 조작은 하지 않았다’와 같은 문장들 역시 같은 맥락 아래 서 있다. 이 두 문장은 끝내 감춰질 것 같던 ‘비선’이 사실로 드러나며 위선의 막을 내렸다.

‘부정 채용은 있었지만 뇌물 범죄는 입증되지 않았다’는 문장은 어떤가. 서울남부지법 형사 13부(재판장 신혁재)가 지난 17일 밝힌 선고의 핵심이다. 법원은 케이티(KT)에 딸을 부정 채용시킨 혐의로 기소된 김성태(62) 자유한국당 의원과 이를 지시한 혐의를 받는 이석채(75) 전 케이티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부정 채용의 사실관계는 인정되지만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뇌물’이라는 사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증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나란히 설 수 없는 사실을 나란히 세워놓고 사실의 결과로 이뤄진 진실을 부정했다.

형사재판은 검찰의 기소권과 피고인의 방어권이 맞서서 각각 최대치의 사실을 끌어모아 다툰다. 이 과정에서 이어지거나 완성되지 않던 사실들이 보충되고 꿰어진다. 이 경합은 그 자체로 진실에 근접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 의원 재판은 그렇지 못했다. <한겨레> 보도 등으로 부정 채용이 명백한 사실로 입증되자 검찰은 시종일관 이 결과를 낳은 청탁과 지시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통 채용 비리 문제를 직권남용이나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하던 검찰이 김 의원은 뇌물 혐의로 기소했지만, 재판부는 검찰의 ‘당연히’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김 의원은 이 모든 일을 ‘정치 공작’으로 치부했다. 그러면서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 된 부정 채용을 해명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김 의원 쪽은 7개월 동안 이어진 재판에서 ‘청탁 사실이 없다’는, 부정 채용을 뒷받침하는 과정에 대해서만 자세하고 꼼꼼하게 따졌다. ‘언제, 어떻게’ 청탁이 이뤄졌다는 검찰의 주장을 흔드는 데만 주력했다.

이런 다툼 끝에 재판부는 검찰이 청탁과 지시의 근거로 제시한, 김 의원과 이 전 회장의 2011년 모임이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하지만, 아직 사실로 입증되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과 동시에 이 사건에 대한 1심 법원의 판단은 매우 기술적인 것이 됐다. 필기시험까지 끝난 뒤 뒤늦게 공채 전형에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김 의원 딸의 케이티 채용은 그래서 부정 채용이면서도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김 의원 딸은 케이티가 전산을 탁 치니 억 하고 합격한 것일까. 판결이 끝나고 김 의원은 후다닥 ‘국민의 승리’를 선언했다. 국회의원 딸이 전산을 탁 치니 억 하고 합격했는데도 무죄가 나온 게 왜 국민이 승리한 일인가. 딸을 3루까지 데려다줘 놓고는 우리 딸이 3루타를 쳤다고 외친다 해도 그 딸 때문에 어느 힘없는 청년이 기회를 잃었다는 진실은 변치 않는다.

1심이 끝났다고 해서 진실 규명이 끝난 건 아니다. 딸의 부정 채용을 사실로 인정한 재판부를 향해 사법이 정의로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비도덕적 아버지가 더는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검찰의 건투를 기원한다.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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