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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83엔으로 시작한 신격호, 123층 롯데월드타워 남기고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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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때 일본 건너가 자수성가…韓 재계 5위 롯데그룹 키워

롯데호텔부터 제2 롯데월드타워까지…'뚝심의 기업가'

뉴스1

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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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신건웅 기자 =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9일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그의 인생은 83엔으로 시작해 국내 최고 높이인 123층 롯데월드타워를 남긴 것으로 요약된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 유학 중 소규모 식품업으로 출발해 한·일 양국에 걸쳐 식품과 유통, 관광, 석유화학 분야의 대기업을 일궈냈다.

특히 일본에서 기업가로 성공한 후 한·일 수교로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시작으로 호텔롯데·롯데쇼핑·호남석유화학 등을 잇달아 창업하거나 인수하면서 롯데그룹을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만들었다.

◇단돈 83엔으로 이룬 롯데그룹

19일 롯데그룹에 따르면 신 명예회장은 1922년 경남 울산군 삼남면에서 5남 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1942년에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가진 돈은 83엔이 전부. 신 명예회장은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학비를 벌며 와세다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학업을 마친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커팅오일 사업을 시작했지만, 폭격으로 전소됐다.

이후 껌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 그의 사업가적 기질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당시 신 명예회장은 풍선껌을 작은 대나무 대롱 끝에 대고 불 수 있도록 함께 판매했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터라 롯데의 풍선껌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껌이라는 상품자체가 식품이라기보다는 심심한 입을 즐겁게 해주는 장난감이라는 제품의 핵심가치를 간파한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지은 회사명이 '롯데'다. 당시 문학에 심취했던 신 명예회장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주인공 이름에서 롯데라는 이름을 따왔다.

'신격호의 비밀'이라는 저서에 따르면 그는 훗날 "롯데라는 이름이 떠올랐을 때 충격과 희열을 느꼈다"며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 최대의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롯데는 이후 초콜릿과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해 성공을 거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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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50년사'에 실린1991년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개장식에 참석한 신격호 총괄회장과 부인 시게미쓰 하츠코 여사, 신동빈 회장 모습.©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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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기업에서 호텔·쇼핑까지…"辛 회장의 승부수"

신 명예회장은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한국 사업에 나섰다.

롯데제과에 이어 1970년대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으며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설립해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 산업 현대화의 토대를 구축했다. 또한 호남석유화학과 롯데건설 등으로 국가 기간산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특히 1973년 당시 동양 최대의 특급호텔로 장장 6년간의 공사 끝에 문을 연 롯데호텔에는 '한국의 마천루!'라는 찬사가 따라붙었다. 지하 3층, 지상 38층의 고층 빌딩으로 1000여 객실을 갖춘 롯데호텔 건설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버금가는 1억5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호텔 사업은 사실 신 명예회장에게도 대단한 모험이었다. 당시 산업기반이 취약한 데다 국내에 외국손님을 불러올 국제 수준의 관광 상품도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롯데호텔 건설에 나선 것은 그의 신념이 작용했다.

신 명예 회장은 "한국의 장래를 깊이 생각했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76년에는 롯데쇼핑센터(現 롯데백화점) 건립공사에 나선다. 당시 국민소득이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소비 욕구와 구매 패턴이 다양해졌지만, 유통업을 대표하는 백화점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미흡했다. 신 명예 회장은 기존 백화점의 2~3배에 달하는 규모로 쇼핑센터를 지었고, 우리나라 1등 백화점의 자리에 올랐다.

관광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지속됐다. 1984년에는 서울 잠실 롯데월드 사업을 지시했다. 임직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지만, 한국의 관광 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결정이었다. 1989년 문을 연 롯데월드는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테마파크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이를 인정받아 신 명예회장은 1995년 관광산업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산업훈장은 그전까지 수출기업이나 제조업종에 집중됐으나, 신 명예회장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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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롯데월드 어드벤처 개장식에서 점등 버튼을 누르는 신격호 총괄회장 내외©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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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게 고궁만 보여줄 수 없다"…롯데월드타워의 시작

2010년에는 그가 그토록 바라던 '제2 롯데월드타워' 착공에 나섰다. 123층·555m 높이의 마천루로, 2017년 완공됐다. 신 명예회장은 제2 롯데월드타워에 대해 '내 마지막 꿈'이라고 말할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언제까지 외국 관광객에게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건축물이 있어야만 관심을 끌 수 있다"며 1987년 '제2 롯데월드' 구상을 발표했다. 30년 만에 숙원을 이룬 셈이다.

다만 말년을 보낸 곳은 소공동 롯데호텔이다. 신 명예회장은 2015년 롯데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이 갈등을 겪으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롯데월드타워에 머물렀지만, 법원 판결로 거처를 옮겨 소공동서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신 명예회장은 재계 마지막 거인이었다"며 "유통 식품 업계의 개척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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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명예회장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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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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