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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즉위 거듭 사양하다 왕위 오른 이성계, 제스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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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8)



경복궁 정전 근정전의 입구인 근정문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참(朝參)행사를 하던 곳이다. 조참의식은 매달 4회(5·11·21·25일) 열리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의식이 있을 때 왕은 사정전에서 근정전 동쪽 처마 밑을 지나 근정전 마당을 거쳐 근정문에 이른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해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북이 세 번 울리면 문무백관이 지정된 위치로 돌아가고 왕이 보여를 타고 나타나며, 악대가 풍악을 울린다. 2품 이상의 관원은 영제교(永濟橋) 북쪽 길 동편에, 종친과 무관 2품 이상은 그 서편에 서고, 3품 이하는 다리 남쪽에 선다.

왕이 자리에 앉으면 전의(典儀)가 부르는 구령에 따라 4배하고, 평신(平身)하면 의식이 종료된다. 이 의식은 모든 신하가 국왕을 알현하는 순수한 의식이었으나, 때로는 의식이 끝난 뒤 조계(朝啓. 업무보고)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즉, 근정문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또 근정문 앞의 영역은 왕의 즉위식이 행해졌던 아주 중요한 공간이다.

왕조의 새 하늘을 여는 가장 중요한 국가의례 중 하나인 즉위식은 대부분 선왕의 장례기간 중 치러졌다. 장례기간과 맞물려 치러지는 즉위식은 일반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흥겨운 잔치 분위기의 성대한 의식이 아니었다. 국상(國喪)에는 왕이 승하한 뒤 5일 만에 대렴(大斂)하여 빈전(殯殿)을 만들고 그 이튿날에 성복(成服)한다. 성복이란 장례기간 중 복제(服制)에 따라 상복을 입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선왕의 사망 6일째 되는 성복일에 왕의 후계자는 빈전 앞에 설치한 천막에서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고 빈전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대보를 받았다. 근정문까지 여(輿. 뚜껑이 없는 가마)를 타고 가서 문 앞에 남향으로 설치된 어좌에 앉음으로서 새 왕으로 즉위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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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한 정종, 세종과 세조, 그리고 명종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치렀고 선왕의 승하 후 단종, 성종, 선조가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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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대부분의 왕들은 선왕의 장례 기간 중에 검소한 즉위식을 정전의 문 앞에서 치렀다. 선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한 정종, 세종과 세조, 그리고 명종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치렀고 선왕의 승하 후 단종, 성종, 선조가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즉위식을 치른 사왕(嗣王)이 근정전에 오를 때에는 동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를 즉조(卽祚)라고 해 오른쪽 계단을 이용해 왕위에 오른다는 뜻이다. 왕의 즉위식이 처음부터 정해진 법도에 따라 근정전에서 치러진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의 개국 이후 초기에는 일정한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따른 여러 즉위형태가 등장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고려의 구도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했다. 태조의 즉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에 의한 조선의 건국과 맞물려 있으므로 상당히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했을 것 같은데, 실록 기사는 예상 밖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1392년 이성계 일파는 왕대비(공민왕 정비 안씨)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고, 그해 7월 17일 이성계는 백관의 추대를 받아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의 즉위 때 왕대비가 옥새를 넘겨주었는데 태조는 자신은 덕이 없는 사람이라며 굳이 거절하였다. 대소신료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해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권고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 못해 수창궁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들이 궁문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올라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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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뜰에서 세종대왕 즉위식이 재현되고 있다. 세종이 즉위 교서를 발표한 뒤 용상으로 향하고 있다. 근정문 누각에서 내려다본 즉위식 전경.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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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즉위를 재촉하는 백관들을 향해 자신은 덕이 없는 사람이라고 거듭 사양하다가 다시 간절히 권하니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추대에 밀려 마지못해 왕위에 오른 것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볼 때, 그 옛날에는 순전히 표면적인 제스처였을 것이지만 그런 형식적인 겸양이 있어야 미덕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에도 심지어 역대 반정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거나 추대되는 모든 왕들이 즉위에 앞서 심하게 울고 사양하는 대목이 실록에 매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2대 왕 정종은 태조의 둘째 아들로 1398년 8월에 책봉을 받아 왕세자가 되고, 9월에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였다. 이날 이문화가 세자를 모시고 근정전에 이르렀다. 세자가 강사포(絳紗袍)와 원유관(遠遊冠)을 바꾸어 입고 왕위에 올라 백관들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면복 차림으로 백관들을 거느리고 부왕(父王)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상왕이라 하고, 백관들을 거느리고 절하면서 치하했다. 정종은 조선의 개국이후 처음으로 근정전에서 즉위한 왕이다. 그리고 정종에게 적자가 없다는 이유로 1400년(정종 2년) 2월에 동모제(同母弟) 정안공(靖安公. 태종 이방원)이 책봉을 받아 왕세자가 되었다. 그해 11월 정종이 별궁에 물러앉고 선위하니, 울면서 사양하다가 예궐(詣闕)해 조복을 갖추고 수창궁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그런데 정종으로부터 선위의 말을 들었을 때 태종은 울면서 사양하고 송구한 마음을 품었다고 했다. 과연 역사의 기록에서 보듯 두 번씩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인 태종의 야망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마당에 웃음이 나오는 눈물이요 사양이 아닌가 싶다. 정종은 속 편하게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천수를 누리다가 63세에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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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에서 재현되는 세종대왕 즉위식.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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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태종은 다시 세종에게 선위하니 조선왕조 초기에는 즉위의 형식이 선왕의 사후 적장자에 의해 승계되는 게 아니라 대부분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변칙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의 왕권 승계가 왕의 적장자인 왕세자에게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문종의 즉위였다. 문종은 조선 건국 이래 적장자로 난이나 세자 교체 없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었다. 문종은 8살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왕도를 배우고 세종 말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은 부왕을 대신해 8년간이나 대리청정을 하였다. 대신들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세종은 1443년(세종 25) 왕세자가 섭정하는 제도를 만들고, 이에 따라 1445년(세종 27)부터 본격적으로 모든 정무를 세자가 맡아보게 되었다. 문종은 29년 동안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준비된 왕이었다.

1450년(세종 32) 2월 세종이 승하하자 문종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문종은 근정전이 아닌 궁궐 밖에서 즉위했다. 세종이 막내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는 바람에 문종은 영응대군 사저에서 즉위를 하게 되었다. 왕이 궁궐 밖에서 즉위례를 치른 것이다. 1450년 2월 22일 문종은 면복 차림으로 빈전 문밖의 장전(帳殿: 임금이 앉도록 임시로 꾸민 자리)에 나가서 즉위의 예식을 행하였는데, 견디지 못할 만큼 슬피 울어서 옷소매가 다 젖었다. 즉위례를 치른 임금은 면복을 벗고 상복을 다시 입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만인 1452년(문종 2) 5월에 39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재위 고작 2년 3개월보다 왕세자로 부왕 세종을 도와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29년이 오히려 문종의 치세였다. 원래부터 몸이 허약했던 문종이 모후(母后) 소헌왕후와 부왕 세종의 삼년상을 연이어 치르느라 건강을 해쳐 고작 재위 2년 만에 승하하고 말았고, 이는 자신의 왕위를 이은 아들 단종을 고립무원으로 내몰게 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문종이 죽자 종법에 따라 그의 적장자인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였고 왕실에는 또 하나의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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