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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 "당신만의 서재를 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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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건축가들이 만든 후암동의 공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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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주방 전경 [사진/전수영 기자]



(서울=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남산 자락에 펼쳐져 있는 후암동은 굽이굽이 골목길을 따라 50년, 100년을 훌쩍 넘은 오래된 주택들이 모여 있는 정겨운 동네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적산가옥과 이발소, 양장점 등 노포 사이에 아기자기한 카페나 소품 가게가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이곳에 '나만의 서재'라는 콘셉트로 운영되는 독특한 공유 공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봤다.

◇ 집 밖으로 나온 서재, 후암서재

눈이 흩날린 12월의 어느 날, 일주일 전 인터넷으로 예약한 후암서재로 향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옛 정취를 풍기는 두텁바위로 골목을 지나니 서재가 나타났다. 낡은 1층짜리 건물이었다. 휴대전화 문자로 받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마치 내 집에 들어가듯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9평 남짓한 공간. 의자 세 개가 놓인 나무로 된 커다란 테이블과 푹신해 보이는 1인용 소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역시 짙은 색 나무로 마감된 벽면은 책으로 채워져 있다.

외관은 허름하지만, 우드톤의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는 은은한 나무 향내와 함께 아늑한 분위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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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서재 내부 전경 [사진/전수영 기자]



테이블과 연결된 중앙의 미니바는 커피와 차를 내려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캡슐커피 기계와 핸드드립 도구뿐만 아니라 와인 냉장고에 제빙기, 맥주 서버(맥주 거품기)까지 갖추고 있다.

비치된 캡슐이나 원두를 이용해 마음대로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고, 와인이나 맥주를 가져와 즐길 수도 있다.

책장 한쪽에 놓인 블루투스 스피커에 핸드폰을 연결해 음악을 튼 뒤 원두를 분쇄기에 갈아 핸드 드리퍼로 커피를 내렸다. 익숙한 선율에 향긋한 커피 향이 서재를 가득 채우니 마치 내 서재에 온 듯 편안했다.

커피를 마시며 벽면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봤다. 건축, 도시, 디자인, 여행, 커피 관련 잡지와 책이 많다. 소설이나 만화책도 있다. 관심 가는 잡지와 책들만 들춰 봐도 하루가 훌쩍 지나갈 것 같다.

서재 한쪽에는 담요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좌식공간도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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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서재의 책들 [사진/전수영 기자]



중앙의 바에는 카드 결제기가 놓여 있다. 서재는 무인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요금도 직접 결제해야 한다.

안내서에 따라 카드 결제기를 켜고 신용카드를 넣은 뒤 요금을 입력하면 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 이용요금은 1만5천원. 커피 두 세잔 가격이다.

대관이 아닌 개인 예약의 경우 최대 3인까지 예약 가능해 같은 날 예약한 사람이 있을 경우 서재를 공유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이날은 운 좋게도 다른 예약자가 없어 1만5천원에 오롯이 공간을 독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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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해 본 후암주방 내부 [사진/전수영 기자]



◇ 공유주방에 이어 공유서재·거실까지 '후암동 프로젝트'

후암서재를 만든 것은 젊은 건축가 6명이 모여 결성한 도시공감협동조합 건축사무소(이하 도시공감)다.

2016년 후암동에 터를 잡은 도시공감은 '이곳에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풀어가 보자'며 '후암동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듬해 봄 '집 밖으로 나온 공유 공간'의 첫 시도인 후암주방을 만들었다.

공유오피스나 공유주택이 흔한 지금과 달리 '공유'라는 개념이 낯설던 때였다.

도시공감 이준형 실장은 "원룸에 사는 청년들은 TV에 나오는 멋진 쿡방을 따라하기엔 주방이 너무 협소하다"면서 "친구끼리, 혹은 연인끼리 와서 요리를 같이 해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상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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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주방 내부 전경 [사진/전수영 기자]



후암서재 인근에 있는 후암주방은 사용료를 내면 누구나 빌려 쓸 수 있는 공유 주방이다. 3평 남짓한 공간에 싱크대와 식탁, 냉장고, 오븐 전자레인지, 블렌더, 밥솥 등 각종 조리 도구와 기본적인 양념을 갖추고 있다.

바로 옆에 후암 재래시장이 있어 미리 재료를 준비해오지 않아도 이곳에서 장을 보고 요리할 수 있다. 이용료는 시간당 7천∼1만원. 특별한 날을 기념하려는 20∼30대 젊은 남녀가 주 고객층이다.

이곳의 냉장고는 항상 가득 차 있다. 이용자들이 쓰지 않거나 남은 재료를 다음 이용자를 위해 두고 간 것이다.

주방 한쪽에 놓인 방명록을 보니 "까나리 액젓 잘 쓰고 갑니다. 저희도 남은 새우젓과 무, 참이슬 두고 갑니다"라는 정겨운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이 실장은 "방명록에 적힌 글들을 보면 내용이 참 따뜻하다"면서 "처음부터 이런 걸 예상한 것은 아닌데 운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가 정착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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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주방의 방명록 [사진/전수영 기자]



후암주방에 이어 2017년 문을 연 후암서재 역시 집에 서재를 따로 두기 힘든 청년들을 생각하고 만든 공간이다. 누구나 편안하게 책을 보고 작업을 할 수 있는, '집 밖으로 나온 서재'다.

서재 용도로 이용하려는 개인 예약자뿐 아니라 독서 모임이나 세미나, 소규모 강좌를 위해 대관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 '후암동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작년 7월에는 세 번째 공유공간인 '후암거실'을 열었다. 핸드폰이나 노트북 화면으로 넷플릭스를 봐야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만든 '우리만의 작은 영화관'이다.

9평 남짓한 공간에 빔프로젝터와 대형 스크린, 5.1 채널 서라운드 스피커 등 홈 시어터 장비가 갖춰져 있다.

공간의 쓰임새는 다양하다. 친구끼리 모여 영화를 볼 수도 있고, 아래층에 있는 커뮤니티 다이닝바 '공집합'의 음식과 술을 주문해 파티를 열 수도 있다.

동네 주민들이 아이의 생일파티를 위해 대여하기도 하고, 주변 직장인들의 워크숍 공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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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거실 내부 전경 [사진/전수영 기자]



도시공감의 '후암 프로젝트'는 수익을 내기 위해 시작한 사업은 아니다. 마을에서 같이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각 공간의 월세를 낼 정도로만 운영하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방과 서재는 단골이 꽤 생긴 덕분에 조금이나마 수익을 내고 있다고 한다.

"이용자들로부터 다른 지역에까지 확대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지만, 프랜차이즈 형태로 운영할 계획은 없습니다. 수익을 내려는 게 아니라 후암동이라는 마을에서 공유 공간을 확대해가자는 취지였으니까요. 다음엔 이 동네에 없는 코인 세탁소나 프라이빗한 공유 스파를 만들어볼까 궁리하고 있습니다."(이준형 실장)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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