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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외국 석학들 "한국 과학 결재받다 날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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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연구 협력을 하자며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제 선정부터 연구비 지출까지 일일이 경영진의 결재를 받아야 하더군요. 너무나 관료적·위계적이라 놀랐습니다."

첨단 물리학 분야의 외국인 과학자가 한국에서 산학(産學) 협력을 겪어보고 한 말이다. 그는 "해외에선 단 한 번도 '이 문제는 경영진과 상의해봐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면서 "이 분야(과학)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연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한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외국인 연구자들이 한국 과학 발전을 위한 고언(苦言)을 쏟아냈다. IBS(기초과학연구원)에서 각각 양자나노과학, 다차원탄소재료, 기후물리 분야의 연구를 이끄는 안드레아스 하인리히(독일·이화여대 석좌교수), 로드니 루오프(미국·울산과학기술원 특훈교수), 악셀 팀머만(독일·부산대 석학교수) 연구단장 세 사람의 이야기다. 모두 노벨상 후보로 언급되는 세계적 과학자다. 이들은 "한국은 '과학대국'이 될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면서도 "진정한 '월드 클래스'가 되려면 한국 과학이 딛고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의 전반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대기업, 과학 연구 적극 나서야"

대기업이 과학 연구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하인리히 단장은 "IBM, 구글 같은 기업들이 과학 연구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유는 결국 (회사를 먹여 살릴) 미래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며 "반면 한국 대기업은 인재 양성을 대부분 정부에 의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계를 뒤흔들 뛰어난 인재는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른다"면서 "기업과 정부가 다양한 기초 과학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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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오프 단장은 "한국 대기업은 대학과 더 많은 교류를 하는 동시에, 대학의 연구는 장기 프로젝트란 걸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기초 과학에 대한 연구 투자는 먼 훗날에 '대박'으로 연결되는 것"이라며 "기초 과학의 연구 성과가 자연스럽게 기업으로 이전돼 경제적 가치를 낳도록 평소에 기업의 연구·개발(R&D) 전문가와 대학·연구소의 연구자가 편하게 교류하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변화도 시급하다. 하인리히 단장은 "한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끈기(patience)"라며 "3년에 한 번씩 정책을 바꿔가면서 과학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노벨상에 대한 한국의 열망이 강한 것을 잘 알지만, 그런 성과를 내기엔 한국의 과학 기반이 약하다"고도 말했다. 정부·정권과 상관없이 수십년을 바라보는 장기적 정책을 흔들림없이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오프 단장은 "한국의 과학 정책 담당자가 미국·유럽의 경쟁자보다 더 국제적이고, 똑똑해야 한다"며 과학 관료의 육성을 제언했다.

◇"한국식 연구실 문화도 바뀌어야"

이러한 변화는 한국 과학계,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문화적 혁신을 요구한다. 루오프 단장은 "한국식 연구실 문화는 의사 결정과 일의 추진이 효율적이지만, 젊은 과학자가 연장자를 위해 일하는 분위기는 피해야 한다"며 "과학을 하면서 윗사람에게 굴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팀머만 단장은 "미국·유럽에선 교수와 학생이 서로 배우려는 분위기"라고 했다. 그는 "학문의 발전이라는 것은 학생이 선생보다 더 나아질 때 이뤄지는 것"이라며 "그런 열린 시스템이 한국에서 통할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인리히 단장은 "학생에게 막연하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기를 바라기보다, 격의 없는 질문과 문제 제기를 장려해 새로운 토론을 유도하고, 더 많은 소통과 비판적 사고가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 사회와 과학계의 국제화다. 팀머만 단장은 "세계 유수 대학은 전 세계를 무대로 최고의 연구자와 학생을 두고 유치 경쟁을 하는데, 한국 대학은 그런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앞으로 학령인구 감소로 한국 대학이 받을 타격을 감안하면 대학이 존재하기 위해서라도 외국인 연구자와 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인리히 단장은 "한국은 지나치게 자국 중심적"이라며 "국제적 경쟁이 가능하도록 우수한 해외 학자와 학생에게 문호를 넓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철환 기자(ploma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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