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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노인돌봄 누구의 몫인가]여성 노동 참여로 생긴 가사·돌봄 공백, 이주여성이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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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에게 넘겨진 돌봄

경향신문

“일반적으로 여성의 노동 참여가 증가하면 가사를 포함한 돌봄노동은 가족 내 남성 수행자로 대체돼야 하지만, 돌봄노동은 이주여성 돌봄 노동자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돌봄 노동자를 대체할 인력이 용이치 않으면 국제결혼 신부라는 새로운 돌봄 전담 인력이 이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2005년, 한국에서는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의 대학진학률을 추월했다. 1990년대부터 고학력 여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가족 내에도 변화가 생겼다. 일터에 나가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여성들은 자녀를 덜 낳거나, 비혼·만혼을 선택하면서 여성의 몫으로만 여겨지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쏟는 시간을 줄였다. 그렇다면 가사와 돌봄노동에 생긴 공백은, 남성들이 함께 나눠 졌을까?

경제력 낮은 아시아 지역 출신

가사도우미·간병인으로 취직

가정에선 시부모·가족 돌봐


김은재·김성천 중앙대 교수가 2017년 쓴 ‘장애인 한국 남성과 결혼한 결혼이주여성들의 삶의 경험과 글로벌 돌봄노동 맥락에 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이 빈자리는 남성이 아닌 ‘이주여성’들이 메웠다. 한국보다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아시아 지역에서 온 이주여성들은 가사도우미·간병인 등으로 일하거나, 시댁 부모와 가족을 돌보고 있다.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이주와 포용사회센터’의 은기수 교수(센터장)는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복지정책에 대한 사회적 비용 지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축에 속했고, 낮은 수준의 복지를 가족이 채워왔다”며 “가족 내 돌봄노동은 ‘가족의 의무’ ‘충효’라는 이름으로 이주여성들에게도 강요되고 있다”고 말했다.

■ 삼형제 중 막내가 어머니 돌보는 이유? “외국인 며느리라서”

베트남 호찌민 인근 마을 출신인 보티끼우(32)는 2007년 국제결혼 중개업소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그때는 페이스북도, 스마트폰도 없어서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는 그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스무 살 정도 위인 남편과 서울에서 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삼형제 중 막내였다.

날씨, 언어, 문화 모든 게 낯선 환경이었지만 보티끼우에게는 적응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결혼 후 곧바로 남편의 형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서빙일을 했다. “식구들 도와주는 일이라서 월급은 따로 못 받았다”고 했다. 서너 달 정도 일하고 있던 중 아이가 생겼다. 출산일을 포함해 딱 2주만 쉬고 실 공장에 나가서 일을 했다. 보티끼우는 “남편이 막노동을 하는데, 일자리를 잘 못 구해서 결혼생활 내내 내가 돈을 벌어야 했다”고 말했다.

5년 전 보티끼우는 남편과 이혼했다. 남편의 폭력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시집살이도 견디기 힘들었다. 보티끼우는 결혼생활 동안 시어머니와 5분 거리에 살면서 시어머니의 끼니를 챙겼다. 남편이 돈을 거의 벌어오지 못했고, 삼형제 중 막내였음에도 부모를 돌보는 건 보티끼우의 몫이 됐다. 보티끼우는 “형님들은 한국사람이고, 나는 외국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임신 중 집에 쌀이 떨어졌을 때, 보티끼우는 남은 쌀로 시어머니 밥을 지어주고 자신은 인근 교회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출산 후에는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친정엄마가 1년 동안 한국에 들어와 육아를 도왔다고 했다.

배우자 부모와 함께 사는 비율

한국인 여성들보다 2배 높아

효·가족의 의무로 강요된 돌봄


보티끼우와 같이 부모와 동거하면서 가사와 돌봄노동을 책임지는 경우는 결혼이주여성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결혼이주여성이 배우자의 부모님과 동거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했는데, 한국인이 남편 또는 아내의 부모와 동거하는 비율보다 약 2배 높게 나타났다.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흔히들 농어촌 지역에 이주여성이 몰려 있고, 이 지역 여성들에게 돌봄노동이 강요된다고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며 “수도권에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도 혼자서 돌봄노동을 떠안는 현실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주여성의 비율이 농어촌 지역에서 높긴 하지만, 숫자로 보면 이주여성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은 수도권인 경기·서울이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결혼이민자의 수는 총 15만9206명인데, 이들 중 83.2%(13만2391명)가 여성이고 46%인 7만2743명이 경기·서울 지역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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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결혼중개업체가 홈페이지를 통해 광고하고 있는 국가별 신부들의 장점.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필리핀 여성 등에 대해 “남존여비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고, 30~40년 전 한국 여성들이 가졌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남아 있어 시부모를 잘 모시고 갈등이 적다”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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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여성 장점이 ‘30~40년 전 한국여성 모습’?

국제결혼 중개업체들 광고

이주여성의 ‘가족돌봄’ 강조

정부도 보육·저출산과 연계


한국사회가 이주여성에게 바라는 것이 ‘가족돌봄’이라는 점을 국제결혼 중개업체들도 잘 알고 있다. 중개업체들은 이들이 한국여성보다 시부모를 잘 모시고, 아이를 잘 키우는 등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인다고 광고한다. 한 중개업체는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필리핀, 중국(한족), 키르기스스탄, 네팔 여성의 특징을 ‘국가별 신부들의 장점’이라고 정리해놨는데, 전부 전통적 여성상을 강조했다. 우즈베키스탄 여성에 대해서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아직도 남존여비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30~40년 전 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졌던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소박함이 있어 남편을 존중하고 가정을 생각하는 여필종부형”이라고 묘사했다. 베트남 여성은 “대부분 정서와 가치관이 남편에게 순종하고, 대가족 사회에서 자라 시집온 후 시부모님과 살아도 부모님을 잘 모신다”고 적어놨다. 필리핀은 “이혼과 낙태를 금기시해 결혼생활에 대한 충실도가 높고”, 네팔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어 한국의 약 30년 전과 같은, 1960~70년대 우리들의 어머니상”이라고 서술했다.

심지어 이주여성 관련 정책을 다루는 정부 부처도 이주여성의 장점을 ‘돌봄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해 12월 4명의 귀화인에게 ‘모범귀화자 기념패’를 수여했다. 법무부가 생각하는 모범적인 귀화인의 모습은 남녀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 남성 모범귀화인 2인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중국동포 출신인 해양경찰과 파키스탄 출신으로 한국에서 높은 수출실적을 올린 사업가다. 반면 여성 모범귀화인 2인은 고령의 시어머니와 어린 자녀 세 명을 혼자 부양하면서 자원봉사활동을 이어가는 베트남 여성, 시부모 등 6명의 대가족을 부양하며 방과후 교사 활동으로 생계비를 벌고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필리핀 여성이다. 이주남성은 ‘산업역군’, 이주여성은 ‘효부’가 모범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허오영숙 대표는 “지자체들이 다문화 지원 업무를 보육·저출산 업무와 엮어 놓은 점도 정부 정책 입안자들의 이 같은 시각이 반영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서울시 자치구들은 대부분 여성가족과 혹은 가정복지과 산하에 ‘출산다문화팀’ ‘저출산대책팀(다문화 가족업무)’ ‘출산장려다문화팀’ 등을 두고 있다.

■ 이주여성의 부모는 누가 돌보나

이주여성 본인의 부모 돌봄은

시간·제도 등에 막혀 ‘막막’


결혼이주여성들은 타국까지 날아와 남의 부모를 돌보지만, 정작 자신의 부모는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 본국에 방문할 시간이 없고, 부모를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고 해도 심사과정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체류기간은 너무 짧다. 결혼이주여성이 자신의 부모를 한국에 데려오려면 현재로서는 최장 3개월짜리 단기 관광비자(C-3)로 데려와야 한다.

단, 정부는 ‘아이돌봄’을 목적으로 입국하는 가족에 대해서만 장기체류의 길을 열어놨다. 법무부의 ‘외국인 체류 안내 매뉴얼’에 따르면, 결혼이민자의 임신·출산이 입증되고 부모가 사망하거나 만 65세 이상 고령 등의 사유로 부모의 출산·양육 지원이 어려운 경우에 한해서 결혼이민자의 조부모 혹은 4촌 이내 혈족 여성이 최장 4년10개월까지 체류할 수 있다. 이마저도 출생 자녀가 만 7세가 될 때까지만으로 한정했다. 이주여성이 부모를 돌볼 수 있게 하는 관점은 어디에도 없고, 외국의 조부모가 한국인 손주를 돌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주여성들은 법무부를 상대로 불합리한 비자 제도 등 차별적인 정책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의 ‘한 자녀 정책’하에서 태어나 대개 외동딸인 중국인 이주여성들의 목소리는 절실하다. 14년 전 한국에 온 중국 출신 이주여성 우닝닝(37)은 “부모님이 아파서 곁에서 오랫동안 돌봐드려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가야만 하지 부모님이 한국에 쉽게 들어오실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시부모님과는 차로 2시간 거리에 살면서 손자, 손녀 목소리 들려드리러 자주 가는데, 친정부모님에게는 아이들을 보여드릴 수 없어 너무 답답하다”고 했다. 우닝닝은 “대한민국은 효도, 효자, 효녀를 강조하는 나라인데 나는 이 나라에 와서 완전 불효녀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국 출신 여성 왕샤오치(35)는 둘째 아들 양육을 돕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친정어머니의 체류기한이 끝나 가서 내년 2월에 이별해야 한다. 왕샤오치는 “엄마가 두 아이를 봐주기 때문에 제가 일을 나갈 수가 있는데, 엄마가 중국으로 돌아가시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허오영숙 대표는 “한국의 돌봄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결혼이주여성들은 정작 자신의 가족을 돌보거나 가족으로부터 돌봄을 받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리즈 끝>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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