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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잔상 심상 환상,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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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아트 대가들의 연말 전시]

광주·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항쟁

임흥순 신작 ‘좋은 빛, 좋은 공기’

두 도시 공통된 민주화 운동 다뤄

“비극의 시간 기억하기 위한 작업”

허상 넘어 나를 찾는 시간

중첩된 일상 속 잊어버린 감각들

홍순철 작가의 초대형 영상으로

자연과 자아, 타인 경계 넘나들어

실제와 가상, 뭐가 진짜일까

청년 아티스트 김희천 신작 ‘탱크’

환각적인 잠수 체험과 혼돈 표출

과감·파격적인 영상언어로 진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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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위로공단>(2015)의 작가 임흥순씨는 최근 신작 <좋은 빛, 좋은 공기>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지구 반대편에서 끄집어 올린 ‘80년 광주의 기억’이다. 푸른 강변에 잇닿은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초록 공원 풍경이 등장한다.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현지 군사정권이 민주화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을 바다에 던져 학살한 ‘더러운 전쟁’의 실상을 추적해온 시민 조직 책임자들의 증언도 연이어 흘러나왔다. 이런 장면들은 40년 전 항쟁의 광주, 해방의 광주를 더욱 절절하게 일깨운다. 그들의 말과 영상이 광주의 상처를 안은 유족과 피해자들의 증언 영상과 서로 맞은편 벽 스크린에 번갈아 등장하는 까닭이다.

“굳은 시멘트 안에 장화가 신겨진 여자 시신이 있었어요. 장화라는 일상적 이미지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제가 보고 있는 장화는 돌처럼 굳은 것이었죠. 많은 이들이 상실과 실종을 비슷하게 여기는데, 실종은 어떤 의구심을 함축해요. 마치 신발 안에 들어 있는 작은 돌멩이처럼 끊임없이 걸리적거리는 어떤 것과 같아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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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시민단체 회원의 희생자 추적담은 광주항쟁 때 희생된 자식의 영정을 든 광주 할머니의 묵묵한 모습과 겹치며 사무친 할머니의 답답함을 대변하는 경구가 된다. 작가가 현지 여성에게 광주의 순우리말은 ‘빛고을’이라고 하자,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미가 ‘좋은 공기’라고 화답한다. 바로 그 순간 한쪽 스크린에 광주 근교의 골짜기 숲에 있는 희생자의 무덤 비석을 쓰다듬고 닦는 어머니의 모습이 비친다. 80년 항쟁 당시 광주 대인시장에서 쑥갓을 본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는 광주 여성의 증언은 푸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풀밭과 강의 빛깔에 스며든다.

42분짜리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서울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에 차린 임 작가의 개인전 ‘고스트가이드’(내년 1월23일까지)에서 상영 중이다. 들어가려면 들머리 작품인 <친애하는 지구>를 지나게 된다. 70~80년대 군부의 학살극이 벌어진 두 도시와 한국, 아르헨티나 근현대사 유적 등에서 모은 돌들이 빗자루에 이불을 둘러씌운 유령 형상 설치작업을 중심으로 빙 둘러져 있는 설치작품이다. 작가는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갈수록 절감하고 있다. 과거의 비극을 경험한 두 도시의 사람들이 겪은 시간과 그 시간의 의미들을 기억하고 생각하기 위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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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속도의 시대, 중첩된 일상 속에서 잊어버린 우리 몸의 감각을 새롭게 떠올리는 것도 예술가들에겐 중요한 기억의 화두다. 1980~90년대 한국 미디어아트 운동의 주축이자 <에스비에스> 피디로 활약했던 홍순철 작가는 실재와 허상의 경계를 넘어 나 자신의 감각을 찾는다는 생각으로 초대형 영상 신작을 최근 내놓았다. 100평 넘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복합1관에서 전남 나주의 죽설헌 숲과 연못의 시공간을 10개의 대형 스크린에 떠서 옮긴 신작전 ‘검은 강, 숨은 숲’(내년 1월27일까지)을 시작한 것이다. 바람에 하늘거리거나 비에 화답하는 숲 소리, 미물의 소리가 함께 들리는 이 스크린 아래엔 빗방울의 파문이 번득거리는 수련 연못이 영상으로 비치는 수조가 있다. 수조의 수면에 투영된 비가 듣는 연못의 영상과 실제 5층 높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파문이 겹친다. 옆 벽면엔 전시장을 떠도는 관객을 찍은 중계 영상이 비치고 또 다른 영상엔 이런 관객의 모습이 나주 현지의 정원 스크린에 중계되는 또 다른 영상이 흘러간다. 자아와 타자의 경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영상을 통해 마구 넘나들면서 참된 자아와 감각이 무엇인지를 헤아려보라고 홍 작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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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실상과 가상의 경계 넘기를 요즘 디지털 세대의 젊은 작가들은 컴퓨터 게임, 다큐멘터리 영상, 브이아르(VR) 등을 넘나들며 훨씬 과감하고 파격적인 영상 언어로 전화시키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상영 중인 청년 미디어아티스트 김희천의 신작 <탱크>(내년 1월19일까지)는 이런 디지털 미디어아트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작품은 심해에 잠수하기 전 감각을 차단하고 온전히 자신의 의식에만 몰입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감각 제어 탱크가 배경이다. 그 안에서 가상 잠수를 한 환각적 경험이 실제 잠수의 경험과 혼란스럽게 얽히고 이런 체험이 게임과 여러 실사 영상들로 표출된다. 작가는 첨단 장치로 감각을 통제하고 정신 내면만 파고들게 되면 현실의 시공간 제약을 벗어나 가상을 일상으로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드러내려 한다.

국내 최초로 영상 예술 회고전도 열렸다. 70년대 초부터 90년대 말까지 기술과 사회적 변화에 따라 독특한 형식과 미학이 출몰했던 한국 미디어아트 역사를 처음 정리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한국비디오아트 7090’전(내년 5월31일까지)이다. 70~80년대 전위 작가 김구림, 박현기를 거쳐 90년대 후반의 박화영, 전준호, 문경원까지 세대별 영상 작가들의 명작과 뒤안길을 돌아보는 이색 전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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