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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안된 유물까지 ‘묻지마 전시’…관객 우롱한 가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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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국립박물관 ‘가야본성’전 논란

역사왜곡 논란 빚은 ‘흙방울’부터

설화 배경만 있는 ‘파사석탑’까지

가야시대와 잇닿는 물증 없는데

의미 과장하며 역사적 진실 포장

‘가야사 복원’ 국정과제 홍보 치중

발굴성과 등 전시 정체성 사라져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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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伽倻)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최근 대중에게 새삼스럽게 가까워진 역사적 명칭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야를 4~6세기 고대 한반도 남부 옛 변한 지역에서 연맹체 국가로 번성했던 대가야, 금관가야, 아라가야 등의 6가야로 이해하곤 한다. 하지만 또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가야’라는 말은 고려 초에야 등장했고, 가야 시대 사람들은 이런 국호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일본서기><삼국지위지동이전> 등의 고대 사서에는 한반도 남부 영남권 지역에서 주로 공존하고, 경쟁하며 이합집산한 10여개국부터 20여개국까지의 소국들이 거명된다. ‘임나’ ‘가락’ ‘가라’ ‘안라’ 같은 이 소국 이름들이 바로 당대 가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불렀던 말이다.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 가락국조를 보면, ‘고려 태조 23년인 경자년(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쳐 첫번째는 금관, 두번째는 고령, 세번째는 비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으로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 통일 직후 호족의 발호로 어지러웠던 지방행정체제를 재편하면서 영남권 남부의 지역 세력들에게 ‘○○가야’라는 명칭을 내려줌으로써 지역 민심을 다독였던 셈이다. 금관가야, 대가야, 안라가야 등의 익숙한 명칭이 그때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일연이 기술한 가야의 한자명 또한 불가의 성산인 가야산을 의식한 것이다. 그러니까 가야 명칭은 실체적 역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가야란 이름이 오늘날에도 유효하게 통용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서 기록이 극히 희박해 가야의 영역·개념·실체를 놓고 여전히 논란과 혼선이 되풀이되고 있고, 이를 대체할 만한 다른 용어를 찾기도 난감한 탓이다. 근대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가야 전체를 일컫는 옛 명칭 `임나‘를 끌어와서 자기네 선조들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배경으로 악용하기도 했다. 최근 가야사 연구와 유적 조사 정비를 현 정부가 국정과제에 포함한 데 대해 역사고고학계가 호응한 이유는 이런 혼란과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일부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작한 특별전 ‘가야본성-칼과 현’(내년 3월1일까지)은 이런 가야사 재조명의 취지에 비춰 기대와 명분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상형토기, 가야갑옷, 다양한 금공예품 등 1000점 이상의 가야 관련 유물이 사상 처음 한자리에 모인 연말 문화판 최대의 전시행사이고, 내년 일본 순회전까지 예정됐지만, 문화재학계 반응은 혹평 일색이다. 그간 가야에 대한 연구 성과를 무색하게 하는 수준 이하의 판타지 전시라는 뒷말이 나오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개념과 명칭, 경계의 난맥상을 정리하긴커녕 혼란을 부추긴다는 말이다.

전시 들머리는 상식을 지닌 학자라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얼개를 보여준다. 올해 경북 고령 지산동 무덤에서 나온 거북등 새겨진 흙방울이 첫 유물로 등장한다. 가야 김수로왕의 탄생 설화가 깃든 구지가 내용을 벽면에 투영하는 입구 복도 끝에 전시를 상징하는 유물로 내놓은 것이다. 이 흙방울은 앞서 고령군과 발굴기관 쪽이 수로왕의 구지가를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억지춘향식 해석을 붙였다가 역사 왜곡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두 번째 유물은 김해에서 뽑아 온 파사석탑이다. 암질을 볼 때 산지는 중국 등 외국일 가능성이 크지만, 학계에서는 고려시대 배에 실은 균형석들을 이리저리 붙여 만들었다고 추정해왔다. 석탑 배경엔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로맨스를 담은 대형 다면 영상이 흐른다. <삼국유사>에 허황옥이 인도에서 올 때 파사석탑을 가져왔다는 설화가 전한다는 설명도 붙었다. 관람객은 이 탑이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로맨스를 상징하는 유물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가야 시대와 연결할 만한 물증이 없고 설화적 배경만 있는데도 내용과 의미를 과장하고 역사를 잘못 이해할 소지를 주는 셈이다.

국립박물관 사람들은 가야 전시와 관련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앞서 28년전인 1991년 기획전 ‘신비한 고대왕국 가야’를 한국과 일본에서 순회 전시하면서 해방 뒤 가야 고고학의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선보인 전례 덕분이다. 이 전시는 당시 한일 양국 학계는 물론 일본의 일반 관객에게도 가야문화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반향이 컸다. 이번 전시는 박물관의 혁혁한 전사를 바탕으로 90년대 후반~2000년대 쏟아진 가야 고분의 새 발굴 성과, 특히 호남 동부권 일대 남원·장수·순천의 새로운 가야권역 유물을 추려서 대중에게 소개한다는 것이 원래 핵심 목적이었다.

이 목적이 달성됐는지는 의심스럽다. 국정과제를 크게 알리겠다는 강박에 휘둘리면서 ‘가야본성’전은 확실한 정체성이 사라졌다. 배기동 관장과 박물관 고고부의 기획진이 전시에서 가야의 본성, 즉 가야의 존재방식으로 내세운 건 가야 여러 소국들의 공존과 화합이었다. 그런데, 두 가지 열쇳말을 명료하게 뒷받침하는 기획의 힘을 전시장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근거와 연구 성과가 거의 없는 남방 문명과의 모호한 연관 관계를 앞세우면서 파사석탑처럼 검증되지 않은 유물이 설화를 업고 전시의 얼굴로 둔갑해버렸다. 함안 말이산 고분과 마산 현동 고분에서 최근 잇따라 출토돼 아름답고 세련된 자태로 세간을 놀라게 한 사슴뿔잔과 배모양 토기 같은 최상급의 상형토기들은 홀대를 받았다. 가야 문명의 독창적인 미의식을 보여주는 걸작이란 점에서 독립진열장에 선보이는 것이 마땅한데도, 유리탑 같은 거대 진열장의 토기 대열 속에 뒤섞여 존재감을 찾기 어려웠다.

화합이란 전시 화두는 특히 공허하다. 소국들끼리의 이해관계에 따라 백제, 신라, 왜와의 합종연횡을 되풀이했던 것이 유적은 물론 고대 사서에서 확인되는 가야의 실체적 역사다. 이를 감안한다면, 전시에서 화합의 근거나 기반을 찾기란 지극히 난망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한일 학계의 오랜 고민거리인 가야의 강역 구분과 호칭 등에 대한 여러 논의는 무기, 갑옷, 칼 같은 부장품 더미에 밀려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고 그나마 일부 학자의 견해만 주로 소개된 듯한 느낌을 준다. 가야 문명의 원류와 관련해 학계에서 가장 뜨겁고 민감한 현안이었던 부여, 선비 같은 고대 북방 이민족 세력과 가야의 연관 관계에 대한 논란 부분도 부각되지 못했다. 북방 고분 문화와 잇닿는 김해 대성동 고분과 양동 고분 등의 관련 출토품들인 금관, 장신구, 말갖춤, 청동솥(동복) 등이 전시 끝부분에 일부 나왔지만, 심층적인 맥락이나 현재까지 학계 논의가 어떻게 전개됐는지에 대해서 전시는 거의 일러주지 않는다.

`가야본성‘ 전은 지난 20년간 가야 유적 발굴과 연구에서 이룬 결실을 균형감 있게, 경중에 따라 꿰는데 실패했다. 진열장 동선을 훑으면 박물관이 확보한 막대한 유물들을 덩치감이 느껴지게 일단 벌여놓고 보여주는데 주력한 인상을 받게된다. 전시 전부터 가야권 지자체와 자전거 타기 대회, 공동 홍보 행사 등에 치중해온 박물관 쪽의 행보는 문화재의 가치를 확정하는 최종 심급 기관으로서의 권위나 책임과는 거리가 멀다. 박물관과 학계의 안팎에서는 전시의 무리한 얼개가 국정과제를 한껏 띄우려는 배기동 관장의 의지와 관여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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