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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노동 갈아 넣은 N잡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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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의 날개 단 ‘장시간·야간노동’은 사회적 안전망서 배제



2004년 법정근로시간을 주 44시간에서 주 40시간으로 줄인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됐다. 지금은 당연하고 보편적인 근무 형태지만 당시만 해도 주5일 근무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줄 ‘생활혁명’으로 불렸다. 밤과 주말이 노동자의 시간으로 편입되면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시간이 확대됐다.

‘투잡’ 열풍이 시작된 시기도 2004년이다. 주5일 근무제로 생긴 시간을 활용해 소득을 올릴 수 있다며 추가 노동을 권하는 투잡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미디어에서도 투잡 성공 사례를 집중 조명했다. 장기불황과 고용불안, 주5일 근무 시대에 투잡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심지어 해야만 하는 자기계발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이 퍼졌다. 단시간에 투잡은 사회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2004년 인터넷 취업포털 잡링크가 직장인 137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전체 직장인의 68.5%가 투잡을 원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투잡을 홍보하는 미디어에서는 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창업이나 노동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실제 노동자들이 투잡을 하겠다며 뛰어든 업종은 대리운전처럼 위험하거나 건강을 해치는 일이 대부분이다. ‘몸을 갈아 넣고’ 푼돈을 쥐는 구조다.

2018년 주 52시간제를 통해 노동자는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동자의 시간은 ‘N잡’ 열풍에 포획됐다. 플랫폼 노동의 활성화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는 일감을 잡아 ‘N잡러’가 될 수 있다며 노동을 권한다. 관련 서적은 물론 이번에는 소셜미디어에서도 더 많은 노동을 홍보한다. 투잡과 N잡은 ‘장시간·야간노동’을 전제로 이뤄진다. 현재 노동시장에서는 고용 여부를 기준으로 노동자를 규정하고 보호하기 때문에 고용관계가 느슨한 부업은 근로기준법·산재보험과 같은 노동안전망에서 배제돼 있다. 노동을 여러 개의 ‘직업’으로 나누어 놓으면 불안정성이 강해진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안전장치’가 없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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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에 실려간 대리운전자

서울의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20년차 직장인 유한국씨(52·가명)는 2008년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당시 유씨는 카드사와 보험사를 전전하며 영업을 했지만 수입이 일정치 않아 애를 먹었다. 자영업을 하다 폐업한 뒤 재취업한 상황이어서 형편도 좋지 않았다. 주변에서 투잡을 권했다. 투잡 서적을 뒤져보고 이곳저곳 부업을 알아본 유씨는 결국 대리운전을 택했다. 당장 밑천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리운전뿐이었다.

유씨는 주말도 없이 대리운전을 했다. 밤 9시 야근을 마친 뒤에도 콜을 잡으러 나갔다. 보통 새벽 1시, 늦는 날에는 새벽 4시까지도 대리운전을 했다. 행선지와 동선이 맞지 않는 날에는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겨울에는 일하던 중에 저체온증이 와서 종종 병원 신세를 졌다. 3년쯤 지나자 몸에 이상이 생겼다. 2011년 4월 유씨는 출근을 하기 위해 눈을 떴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구급차에 실려 입원한 그는 신경염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평형감각에 이상이 생겨 정상 보행이 어렵다고 했다. 치료받기가 쉽지 않았다. ‘숨겨야 하는 노동’을 한 탓에 직장에 전후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만약 유씨가 소속된 회사에서 일하다 탈이 났다면 산재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었겠지만 투잡으로 인한 재해는 모든 책임이 노동자 몫이다.

장기 병가를 내면 직장에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에 유씨는 몸이 아픈 상태로 직장에 복귀했다. 틈틈이 병원에 다녔지만 후유증이 생겼다. 트라우마가 생겨 한동안은 운전대를 잡는 데도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유씨는 최근에 대리운전을 다시 시작했다. 유씨는 “투잡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그렇지만 당장 오늘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다시 대리일을 한다”고 말했다.

2015년 서울노동권익센터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대리운전기사의 37.9%는 야간노동으로 인한 우울증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63.7%는 수면장애를 겪고 72.2%가 잦은 도보 이동 때문에 근골격계에 이상을 느끼는 것으로 집계됐다.

16년 동안 대리운전을 했던 민현세씨(자영업·65·가명)도 온몸이 고장났다. 대기시간에 엎드려 쪽잠을 잤던 탓에 등이 굽었다. 6년 전부터는 심한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다. 통증이 심한 날은 서 있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민씨는 2003년 <두 배로 벌면 열 배로 즐겁다>란 책을 보고 투잡을 결심했다. 옷장사를 했던 민씨는 가게 문을 닫고 새벽까지 대리운전을 했다. 민씨는 “결과적으로 두 배로 벌지 못했고 건강을 잃었으니 즐겁지도 않다”며 “과로로 암에 걸려 죽고, 사고로 다친 동료를 숱하게 지켜보면서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왔던 일”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배달대행업체 소속 배달원이 오토바이로 이동 중 잠시 인도에 멈춰 서 있다. 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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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노동 2급 발암물질로 규정한 ILO

국제노동기구(ILO)는 야간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규정하면서 “야간노동을 하면서도 건강을 해치지 않기 위한 대안은 없다”고 경고한 바 있다. 독일 수면학회는 야간노동자의 수명이 일반 노동자에 비해 10년 이상 짧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그럼에도 이들 노동의 위험성은 ‘투잡’이란 이름으로 포장돼 가려져 왔다. 정연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야간근무를 포함한 교대근무를 공공부문 및 장치산업 등의 불가피한 영역에 국한시켜야 한다”며 “장시간 노동을 규제하고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의학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과로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질병 부담’·보건복지 이슈 앤 포커스)

최근 장시간·야간노동은 플랫폼의 날개를 달고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장시간·야간노동의 최전선에 있는 배달노동자의 안전망은 되레 악화되고 있다. 경기도에서 배달대행을 하는 심민경씨(22·가명)는 지난 11월 밤 수인로에서 배달을 가던 중 사고를 당했다. 앞 차량이 갑자기 끼어들면서 추돌을 피하려다 급정거를 하면서 미끄러졌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고 3주 동안 치료를 받았다. 개인사업자 신분인 심씨는 산재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일부 배달대행 업체에서는 배달노동자가 보험료의 50%를 부담하면 산재보험에 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뒀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배달노동자가 산재비를 냈더라도 실제로 산재 보호를 받기 힘들다고 말한다. 대부분이 노동부의 산재 적용기준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재보험에 가입한 동료가 사고로 휴업급여를 신청했는데 결국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음식점과 배달업체는 추가 요금을 내면 더 빠른 배달을 하는 이른바 ‘번개콜’ 시스템을 도입해 배달노동자들을 더 큰 위험으로 몰고 있다.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은 “한국의 저임금 구조가 위험한 투잡 노동시장이 확산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플랫폼은 장시간·야간·불안정 노동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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