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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저유소 화재’ 송유관공사에 고작 ‘벌금 300만원’…폭발 책임은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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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등 날린 책임은 어디까지…주목받는 ‘디무두의 재판’

경향신문

지난해 10월8일 경기 고양시에 있는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의 휘발유 저장탱크가 폭발한 뒤 소방 관계자들이 현장 조사를 벌이고 있다. 7일 오전 발생한 불은 17시간 만인 이날 오전 완전히 꺼졌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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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오전 10시경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403호 법정 방청석에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관계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지난해 10월7일 이들이 관리하는 ‘고양저유소’의 휘발유 저장탱크가 폭발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관련 수사가 시작되고 이들은 지난 6월 재판에서 넘겨졌다. 앞서 검찰은 박모 경인지사장에 300만원, 김모 안전부장에 500만원, 이모 근로감독관에 400만원, 대한송유관공사에 300만원의 벌금형을 구형했다.

공소장변경 등이 이뤄지면서 선고가 다소 지연됐지만 재판은 간단히 끝났다. “박○○·김○○씨에 벌금 200만원, 이○○·대한송유관공사에 벌금 300만원.” 고양지원 형사4단독 송효섭 판사가 선고했다. 송 판사는 이들이 혐의를 인정하고 화염방지망 등을 설치했으며 범죄전력이 없다며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주문을 들은 관계자들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법정을 나섰다. “벌금 통지서가 곧 올 겁니다.” 변호사는 간단히 이후 절차를 설명했다.

고양저유소 화재, 1년여 지나고

임직원에 관리 부실 책임만 물어

“솜방망이 처벌이란 말도 부적절”

탱크 폭발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


사고 직후 조사서 지적된 ‘건초’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인화방지망’

압축된 유증기가 나왔을 가능성


18일 다시 열리는 디무두의 재판

이땐 어떤 해석이 힘을 얻을까


검찰의 공소장을 보면, 송유관공사 관계자들은 저유탱크에 설치하는 통기관(오픈벤트)과 인화방지망 등 설비에 대해 유지·보수·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저유탱크 주위에서 제초 작업을 하면서 건초를 방치해 안전관리규정 준수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송유관안전관리법 위반 등)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과 함께 기소된 이 근로감독관은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경기지청 수도권중대산업사고예방센터에서 일하면서 인화방지망 설치에 대한 2014년 시정 확인결과보고서를 허위 작성한 혐의(허위공문서 작성)로 기소됐다.

지난해 가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풍등 화재 사건’은 이렇게 조촐하게 마무리되는 것일까. 사실 이 재판은 고양저유소 화재사건, 엄밀히 따지면 저유소 폭발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검찰의 공소장에는 10월7일 벌어진 고양저유소 폭발사고는 거론되지 않았다. 관리 부실은 있었지만 폭발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 저유소 폭발에 대한 형사 책임을 묻는 재판은 오직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청년 디무두 누완(28)에 대해서만 열리고 있다. 디무두의 변호를 맡은 최정규 변호사는 선고 결과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란 말도 부적절하다”고 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은 11월16일자 토요판 커버스토리로 지난해 호기심에 풍등을 날렸다가 ‘고양저유소 화재’를 일으킨 피의자로 몰린 스리랑카 청년 디무두의 이야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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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발의 조건

저유탱크가 폭발했던 당시 상황을 다시 되짚어 보면 최 변호사가 선고 결과에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인 이유를 알 수 있다. 고양저유소에는 저유탱크가 14개 있는데, 유증기가 발생하는 휘발유 탱크는 4개다. 이 중 2개가 폭발했다. 이곳의 저유탱크는 군사보안 문제로 땅에 매몰된 형태로 지어졌다. 탱크 상부에는 내부 유증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통기관이 설치돼 있다. 이 통기관에는 인화방지망을 설치해야 한다. 인화방지망은 40메시(1인치에 40개의 구멍) 규격의 구리망인데, 오랫동안 강한 화염에 노출되지 않으면 불꽃이 통과하지 않는다. 인화방지망을 놓으면 휴지도 타지 않는다.

폭발을 피한 저유탱크를 살펴보니 인화방지망이 안으로 말려 손상된 상태였다. 통기관 입구에서 떨어져 틈새가 벌어지거나 찢어진 것도 있었다. 모든 탱크에서 손상된 인화방지망이 발견됐다. 이 인화방지망에 인위적인 손상을 입힌 뒤 실시한 경찰의 실험 결과, 화염이 인화방지망을 뚫고 가 폭발이 일어났다.

탱크 주변에 있던 건초도 문제로 지적됐다. 폭발 사고 직후 현장조사 도중 탱크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마른 잔디를 목격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측은 “가연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건초가 생긴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화재 발생 전 9월17일부터 사흘 동안 저유탱크 주변에서 제초작업이 있었다. 조별로 지역을 나눠 제초하고 잘라낸 잔디를 송풍기로 날려 보냈다. 불꽃이 튀지 않도록 예초기의 날은 플라스틱 끈 형태로 된 걸 사용했고, 저유탱크 입구 부분은 따로 낫을 사용했다. 잡초가 길지는 않았지만, 무릎 언저리까지 자란 것도 있었다. 잘라낸 잔디를 날려 보낸 이유를 묻자 송유관공사 관계자는 “한곳에 (작업한) 잔디를 모아두면 제초작업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보기에도 안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잘린 잔디와 잡초는 20여일 동안 누렇게 말라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 “유증은 폭탄”

화재 원인을 분석한 경기북부경찰청 자문위원단은 화염이 인화방지망 내부로 유입돼 유증기를 만나 폭발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봤다. 불이 채 꺼지지 않은 풍등은 잔디밭에 낙하했고, 불이 건초에 옮겨붙은 뒤, 불씨가 인화방지망을 넘어 탱크 내부 유증기에 착화돼 폭발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높게 봤다. 전날 마침 저유탱크에 기름을 넣어 용량 대비 85%의 휘발유가 가득 들어 있던 내부에서 압축된 유증기가 밖으로 새어 나왔을 것이란 분석이었다. 휘발유는 유증기를 발생시킨다. 송유관공사 관계자들도 휘발유가 얼마나 위험한 기름인지 알고 있었다. 한 관계자는 “유증은 한마디로 폭탄”이라고 했다. 조그만 불꽃으로도 유증기는 폭탄 터지듯 폭발할 수 있다. 인화점이 영하 43도라서 더 위험하다. 정전기에도 불이 붙는다. 송유관공사의 한 직원은 “아직까지 탱크 주변에 가면 무섭다”고 했다. 사건 당시 저유탱크 철판 덮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떨어진 것도 유증기의 위력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위험한 휘발유 탱크는 철저하게 관리됐을까. 저유소 폭발 당시 고양저유소 통제실에서 근무했던 ㄱ주임은 오전 11시쯤 예정된 송유준비를 하느라 저유탱크 주변에서 연기가 나는 모습이 담긴 통제실 CCTV 모니터를 18분가량 확인하지 못했다. 30여개의 CCTV 영상이 모니터 2대를 통해 나오고 있어 모니터 화면을 주시하지 않으면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시스템이라고 한다.

“CCTV 영상이나 (사고 원인에 대해 보도된) 기사도 봤을 것 같은데, 연기가 18분간 지속되도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나요?” 경찰이 물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송유 준비하느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되나요?” “…….” 경찰이 다시 물었다. “(송유를 위한) 펌프 가동을 10시52분 (인천지소에) 통보했고, 직후 탱크가 터졌다고 하는데 통제실 내부에서 비상벨이 울린 적이 있나요?” “없었습니다.”

저유탱크 내부에는 거품 형태의 ‘폼소화제’를 뿌리는 소방설비가 설치돼 있지만 저유소가 갑자기 폭발한 상황에선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 소화설비는 근무자가 직접 버튼을 눌러 작동하는데, 외부에서 화재를 자동으로 인식해 소화하는 시스템은 없었다. 탱크 내부 온도가 일정 수준 이상 상승하면 경보점멸등만 작동한다. 외부 화재를 발견하면 상황을 알린 뒤 직원들이 직접 초동조치를 해야 하는 구조다. 게다가 통제실 직원은 단 1명뿐이었다. 이날 출근한 직원은 6명 정도였지만, 폭발음이 들리기 전 화재를 인지한 사람은 없었다.

송유관공사는 평소 다이너마이트 발파 작업으로 터널공사가 이뤄지던 ‘서울~문산 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1-1공구’에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내 주의를 당부했다. “고양저유소는 수도권 경기북부지역 및 김포공항, 인천국제공항에 석유제품을 공급하는 회사로서 항공유를 포함한 석유제품이 정상적으로 공급되지 않을 경우 시민들의 민생은 물론 국내 및 국제선 항공기 운항정지 등으로 인한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국가지정 재난 중점 관리대상 시설”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내부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았던 셈이다.

■ 인과관계

다시 디무두의 재판으로 돌아가보면, 검찰은 디무두가 풍등을 날린 행위는 저유소 폭발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고, 풍등을 날리지 않았다면 폭발도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로 공소를 제기했다. 저유소 폭발의 결정적인 촉발원인이 풍등이고, 이 풍등을 날린 행위를 한 디무두가 저유탱크를 폭발시킨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디무두가 화재위험 등에 대한 안전교육을 받았고 저유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수사기관의 주장은 이러한 논리를 보강하기 위해서 부각됐다.

디무두의 변호인단은 풍등을 날려 저유소를 폭발시켰다는 실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풍등을 날린 것과 저유탱크 폭발이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지만,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저유탱크 폭발의 유일한 형사책임을 디무두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잔디에 불이 붙은 1차 사고와 저유탱크가 폭발한 2차 사고가 있는데, 1·2차 사고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단절돼 있으므로 1차 사고에 대한 책임만 지면 된다는 주장이다. 실화죄의 구성요건에 잔디에 불을 붙이는 행위는 포함되지 않으므로 무죄라는 논리다.

고양저유소 폭발은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일어났다. 전날 인근 초등학교에서 ‘아버지의날’ 행사를 하며 풍등을 날렸고, 이 풍등 중 2개가 디무두가 일하던 건설현장에 떨어졌다. 그때 그가 이 풍등을 발견했고, 한 개를 주워 검게 그을린 연료에 불을 붙였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날려보낸 풍등은 저유탱크에서 11.8m 거리인 잔디에 떨어졌다. 건초에 불이 붙었고, 인화방지망을 뚫고 유증기에 불이 옮겨붙어 폭발이 일어났다.

이 정황을 송유관공사의 안전관리라는 각도에서 보면 다른 원인도 보인다. 저유탱크 주변엔 마른 잔디가 방치돼 있었고, 통제실에선 잔디에 불이 붙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불길을 막아야 했던 인화방지망은 제 기능을 못했다. 인과관계에 정답은 없지만 결과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행위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에 대해선 다양한 학설과 법률 이론이 존재한다. 디무두의 재판에선 어떤 해석과 이론이 힘을 얻을까. 디무두의 재판은 오는 18일 오후 증인신문으로 다시 시작된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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