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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오현석 캡박스 대표 “사용자가 먼저…블록체인 기술은 그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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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오현석 대표와 마주치곤 했다. 하루에 각각 다른 장소서 세 번이나 만난 적도 있다. 그는 세 번으로 모자랐는지, 중간에 대학생과 함께 하는 블록체인 스터디 모임도 다녀왔다고 했다. 늦게 시작해서 더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말과 함께. 블록체인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겠다 싶었다.

오현석 캡박스 대표. LG전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모바일 서비스 분야에서 근무하다 GS홈쇼핑으로 자리를 옮겨 벤처투자 심사역을 맡았다. 이후 애드포스와 아이콘이 함께 만든 블록체인 액셀러레이터 디블락 대표를 역임했다. 그러다 올해 10월, 엔젤투자자를 위한 비상장 주식 관리 서비스 캡박스를 창업했다.

오현석 대표가 갑자기 새로운 사업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적잖이 놀랐다. 그는 “일반인이 쓰는 블록체인 서비스를 직접 만들고 싶어서”라고 짧게 이유를 밝혔다. 몇 달 뒤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준비하는 사업에 관심이 집중됐다. 그런데 사업 아이템을 듣다 보니 블록체인 사업 같지 같았다. ‘탈블’한 것 같다는 나의 말에, 그는 굿바이(Good bye) 대신 씨유(See you)라 답했다.

블록체인 업계를 떠난 듯 떠나지 않은 오현석 대표. 궁금했다. 그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걸까? 단풍이 짙게 물든 어느 날, 역삼동에 있는 캡박스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탈블: 블록체인 업계를 떠나는 행위를 뜻하는 은어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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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처 캐피털(VC)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요. 어떤 계기로 블록체인 업계에 들어왔나요?

벤처투자를 하다 보니 새로운 흐름이 오는 게 보였습니다. 과거 인터넷 바람, 모바일 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블록체인도 하나의 큰 바람이라고 느꼈죠. 블록체인 업계 사람들이 말하는 탈중앙화 사상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면 먼저 들어가서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홍준 위블락 대표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아이콘과 함께 블록체인 전문 액셀러레이터를 만든다고 해서 새로 만든 회사 디블락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 디블락에 합류한 후 무엇이 달라졌나요?

지금까지는 잘 갖춰진 환경에서 잘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됐어요. 하지만 디블락에 오고서는 처음부터 모든 일을 다 직접 해결해 나가야 했습니다. 제가 잘하지 못하는 일도 많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죠. 하지만 그 어려움을 느껴보고, 이겨내기 위해 온 것이어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또 기존에도 투자 업무를 해왔지만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관점은 많이 달랐습니다. 일단 블록체인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빨리 파악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프로젝트를 만나보려고 했습니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요. 하루에 8개의 프로젝트를 만난 적도 있습니다. VC 업계에 있을 때는 보통 2~3개의 스타트업을 만났는데 말이죠.

-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투자할 때는 어떤 점이 달랐나요?

투자하는 방식, 기대 수익률, 수익을 수확하는 타이밍이 달랐죠. 특히 투자자금의 유동성 차이가 컸습니다. 에쿼티 투자(지분 투자)는 7년에서 10년까지도 보고 투자하는데 토큰 투자는 그런 느낌으로 가지는 않았어요. 토큰이 거래소 거래목록에 등재되면 짧은 기간에 상당한 수익을 수확하고 엑싯(Exit)할 수 있었습니다.

- 투자 기간을 더 짧게 봤나요?

스타트업은 짧은 기간 안에 승부가 나지 않기 때문에 긴 호흡으로 봐야 했습니다. 주식을 오랫동안 보유하면서 스타트업과 함께 가는 거죠. 블록체인 프로젝트도 짧은 기간 안에 승부가 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 동일하게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접근 방식이 맞다고 생각하고요. 대신 투자하면서 신경 쓰이는 건 있었어요. 토큰에 투자하면 어느 순간 바로 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까지 고려해야 했습니다.

- 주로 토큰에 투자했나요?

2018년까지만 하더라도 토큰 공개(ICO)를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많아 대부분 토큰에 투자하는 형태로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시장 상황이 변하면서 ICO를 하려는 프로젝트가 없어졌어요. 자연스럽게 기술을 활용하려는 프로젝트 중심으로 만나게 됐고, 이때부터 주식 투자 위주로 진행했습니다.

- 투자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진정성 없이 사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대표가 구속되는 불미스러운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고요. 특히 대중을 현혹할 수 있는 상황이 쉽게 만들어졌어요. 일반인들이 큰 피해를 당하는 걸 볼 때면 안타까웠습니다.

투자하면서 손실이 발생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사업에 대한 진정성조차 없이 일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힘들었습니다. 어떤 산업이든 초기에 겪는 현상이긴 하지만 좀 과했던 것 같습니다.

- 업황으로 인한 어려움도 있었을까요? 오랫동안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요.

없습니다. 블록체인에 대한 믿음은 여전합니다.

- 토큰에 투자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리스크 관리가 힘들다든가 하는.

전에 하던 VC 투자도 어차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싸움입니다. 유동성이 높다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토큰 투자의 리스크가 더 적었어요. 업계에서 배임, 횡령 같은 법적 문제를 자주 목격하다 보니 더 위험해 보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사람을 보고 투자해서 이런 문제는 자연스럽게 걸러졌던 것 같습니다.

- 사람을 본다?

초기 프로젝트는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전부입니다. 사업 방향성이나 방법론은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요. 당연히 바뀌어야 하고요. 이 팀의 멤버들이 지금 하려는 일에 최적화된 행보를 걸어온 팀인지, 하려는 일이 시장성이 있는지, 가치가 있는 일인지 등을 살펴보고 결정했습니다.

- 토큰에 투자할 때도 VC 업계에서 투자했을 때와 동일한 관점을 취한 것 같은데요. 다르게 본 부분도 있을까요?

주식이든 토큰이든 동일하게 접근했습니다. 다만 크립토 세상이 글로벌화되어 있다 보니 ‘이 팀이 글로벌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팀이구나. 급변하는 업황에 맞춰 조금 더 빠른 템포로 움직일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좀 더 눈여겨봤습니다.

- 얼마 전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요.

예전부터 사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다만 블록체인 업계에 들어올 때는 투자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처음이니까.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 어떤 사업을 시작했나요?

창업자, 직원, 투자자가 회사의 주식을 실시간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 ‘캡박스’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이런 아이템을 선정하게 된 배경이 있나요?

5~6년 전 처음 스타트업 업무를 시작했을 때 주식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당황했던 적이 있어요. 투자를 했는데 실제 증권 계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증권을 종이로 받은 것도 아니고, 해당 주식의 보유를 주민센터에 등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겨우 주권미발행확인서와 법인인감증명서만 받고 끝났어요. 수십억을 집행했는데 말이죠.

투자 받는 회사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 회사에 투자를 집행하기 위해 캡 테이블(기존 주주명부와 주당인수단가를 기록한 자료)을 요구해서 엑셀 파일로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주주들이 주식을 소수점으로 갖고 있는 거예요. 비트코인 얘기가 아닙니다. 주주명부는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인데도 정확하지도 않은 값으로 대충 저장해서 관리되고 있는 거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주주 관리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엔젤투자자에 초점을 맞췄어요. 엔젤투자자는 초기 투자를 통해 큰 기여를 했음에도 주식 관리 및 정보 획득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요. 그래서 엔젤투자자 쪽부터 시작해 점차 확장해가려고 합니다.

- 서비스 대상은 비상장 회사로 보이는데요.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다면 이들의 행동을 바꾸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어 보입니다. 비상장 회사에서 반드시 캡박스를 이용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주식회사에서 주주 관리 같은 업무를 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꼭 필요하지만 어려운 일(전문성이 필요한 일)이어서 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거죠. 이로 인해 생기는 구멍을 메워주는 데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마디로 회사가 본업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 준비하는 사업에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블록체인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라 보고 있어요.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서 서비스를 만들려고 하다 보니 생각이 갇히는 것 같았습니다. 기술부터 적용하면 사용자를 놓치기 쉽기도 하고요. 사용자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기술을 붙이고자 합니다. 일단 서비스를 만들고 시장의 검증을 받으면서 블록체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싶을 때 거기에 기술을 적용하는 거죠.

- 어떤 점에서 블록체인 기술이 필요할 거라 생각하나요, 캡박스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블록체인 기술은 엄청 높은 신뢰도나 투명성을 요구하는 부분에서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어요. 예를 들어, 30% 정도의 신뢰도를 갖는 서비스가 있는데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해 90%로 높이려는 시도는 효과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애초부터 30% 정도의 신뢰도만 가져도 충분한 서비스였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영역에서는 99%도 부족합니다. 블록체인 기술은 부족한 1%를 채우기 위해 가치 있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100% 신뢰도를 요구하는 증권 쪽도 언젠가는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할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전자증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증권을 전자로 구현한 것이니까요. 블록체인 기술이 디지털 화폐 · 자산 부문에서 가장 검증된 방법이기도 하고요. 다만 국가적인 일이고 세계적인 문제다 보니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중요한 건, 시장이 원하는 타이밍에 시장이 원하는 수준의 기술을 적용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콩코드 여객기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이 많이 탈 거라 생각했어요. 빨리 날아가니까요. 하지만 시장에서는 실패했습니다. 속도에 대한 니즈가 기존 비행기를 대체할 만큼 크지는 않았던 거죠. 블록체인 기술도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부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서비스에 어떻게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지금 얘기하기는 너무 섣부른 면이 있습니다. 저도 사업을 계속해봐야 알 것 같아요. 빠르게 테스트하면서 린(lean)하게 움직이다 보면 다른 곳보다 먼저 발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 그 외에도 블록체인 기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영역이 있나요?

신원 증명(DID)입니다. 아이콘에서 추진하는 ‘마이아이디 얼라이언스’를 예로 들 수 있죠. DID는 앞으로 중요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10살 아들을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유튜브 보고, 배그(배틀 그라운드)하면서 하루 종일 놀고 있는데요. 제 아들이 사는 세상은 온라인 쪽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것 같아요. 그런데 유튜브 아이디, 배그 아이디, 다른 포털 아이디까지 각각 보유하고 있는 게 많이 어색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오프라인에서는 오현석으로 살고 있는데 온라인에서는 나에 대한 아이디를 여러 군데에 각각 만들어 보유하고 있어요. 경험이 끊어지는 것도 어색합니다. 제가 사회에서 갖고 있는 지위가 배그에서는 반영이 안 되니까요. 앞으로는 이런 것들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대표님의 계획이나 목표를 듣고 싶습니다.

일단 지금 준비하는 서비스를 사용자가 편하게 쓰도록 만들어야죠. 그러다 필요한 곳에 블록체인 기술을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하겠고요.

조금 더 길게 보자면, 비상장 주식 거래량이 연 6조~10조 원 규모입니다. 그런데도 거래를 할 때마다 수많은 리스크에 노출돼 있어요. 이런 시장을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비상장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주주와 회사의 니즈에 맞춰 안전하게 관리하고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습니다.

[김도윤 디스트리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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