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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세상읽기] 아무도 꿈을 묻지 않은, 아이들을 살릴 시간 / 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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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진 ㅣ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바다가 끝내 삼켜버린 소년들의 시신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소라와 낙지 같은 보드라운 것들은 죽은 소년의 몸에 붙어 눈구멍부터 파먹었다.”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구술 기록집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의 한 대목이다. “머리에 방망이가 날아가서 골이 팍 터졌거든요. 애가 눈이 탁 터지면서 바로 탁 쓰러지는데 부들부들하는 거예요. 머리는 피가 철철 흐르고… 그런데 조장이 그런데도 막 패요.” 형제복지원 한종선씨의 기억이다. 종선씨는 9살, 누나는 12살에 그곳에 끌려갔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부랑인’ 단속 지시가 내려졌다. 구두를 닦거나 껌을 파는 소년들, 술에 취해 벤치에서 잠든 사람들이 경찰과 공무원에게 잡혔다. 정부가 지원하는 시설이라며 자녀를 맡긴 사람도 있었다. 가난한 종선씨의 경우다. 1987년 겨울 울주군의 야산에서 꿩 사냥에 나선 젊은 검사가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강제노역을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김용원 검사가 형제복지원을 급습하기 전까지 3천명의 사람이 끌려갔고, 사망한 사람은 500명이 넘었다.

2006년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과 8월 전남 나주경찰서(나주부대) 소속 경찰관들이 해남읍과 완도읍 등 5곳에서 주민 35명을 학살했다”고 발표했다. 나주부대는 인민군으로 오인하게 만들어, 인민군 환영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화를 입을까봐 환영장에 나간 주민들을 살해했다. 과거사위는 ‘경찰이 주민을 희생시키는 과정에 어떠한 법적 처리 절차도 없는 임의처형이었다’고 밝혔다. 1992년 8월29일 한 노동자가 실종됐다. 군대에 끌려갔는지 공안당국에 잡혀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의문사위는 시흥역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한 신원불상의 변사자가 박태순임을 확인했다. 기무사가 사망 당일까지 미행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씨가 판문점으로 내려오던 날, 1989년 8월15일 거문도 해수욕장에 시신 한구가 떠올랐다.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이었다. 맨몸에 바지 혁대도 없었고 이마 오른쪽에는 골절상이 있었다. 경찰은 ‘이내창이 머리를 식히려 거문도에 내려가 암석 해안을 거닐다 발을 헛디뎌 추락해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의문사위는 이내창이 안기부 직원과 동행했고 사망 시점에 현직 군인들이 같은 장소에 머물렀음을 발표했다. 국가기관이 밝혀냈고, 더 밝혀내야 할 과거사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5년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을 근거로 활동하다가 2010년 해산할 때까지 항일독립운동, 반민주적·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을 조사하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활동했다. 법에 의해 비극적 근대사에 사라진 사람들의 서사가 드러났다. 개정 입법이 필요했다. 아직 3천명의 미신청 유족이 존재하고 활동 종료 뒤 형제복지원, 선감도 같은 강제수용 사건을 비롯한 국가폭력이 추가적으로 밝혀졌다. 권고사항 이행을 비롯한 후속 조치도 필요하고 진실 규명을 위한 조사도 더 필요하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의 경우는 유해 발굴조차 다 못 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국회는, 아니 자유한국당은 입법을 방해하고 있다. 법 통과만 하게 해달라 무릎 꿇고 호소하는 ‘나주부대 학살 사건’ 유족에게 나경원 원내대표는 “저한테만 그러시지 말라”며 자리를 피했다. 법 통과를 위해 이미 너무 많은 법조항을 양보하며 매달리는 유족과 피해자들에게 해서 안 되는 뻔뻔한 말이었다.

황교안 대표가 단식 8일 만에 의식을 잃었다며 요란 법석을 떨던 때, 한 남자가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지붕에서 의식을 잃었다. 크레인이 올라갔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중학생 시절 빵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최승우씨다. 한국당이 방해하는 그 법을 통과시켜달라 호소하고 있었다. 당뇨를 앓으면서도 24일 동안 물과 소금, 약간의 효소만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영하로 내려가는 위태로운 곳에서, 불도 난방도 없는 1인용 텐트에서 홀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시인은 말했다.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다.” 그러나 최승우의 과거는 오늘도 단절되어 있다. 수용소로 다시 끌려가지 않으려 목숨을 다해 도망쳤던 아이들을 살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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