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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지소미아 막판 봉합…한국은 '어음' 일본은 '현찰'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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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한국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종료 유예 결정과 한ㆍ일 간 수출관리정책 대화 개시 결정은 지소미아의 만료 시한(22일 자정)을 불과 6시간 남겨놓고 발표됐다. 반전을 거듭한 ‘지소미아 심폐소생극’의 숨은 감독은 미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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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연기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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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가 확실시되던 정부 안팎의 기류에 변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전날인 21일쯤이었다. 오전 열린 청와대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고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소미아를 종료할 경우 외교적 후폭풍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표명했다고 한다. 22일 오후 NSC 상임위원회 전까지도 상황은 유동적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지소미아를 종료할 것인지 아닌지는 50대 50이었다”고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전했다.

이날 NSC 상임위원회에는 지소미아 종료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국방부가 외교부의 지원 병력으로 보태졌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일정을 하루 단축해 이날 오전 귀국한 것. 국방부 관계자는 “사우디 왕실 인사 등 주요 인물과 공식 회동 일정은 모두 소화한 데다 지소미아 등 걸려있는 현안까지 있어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말했다. 이례적으로 문재인 대통령까지 참석한 이날 NSC 상임위원회에서 결국 지소미아 종료의 조건부 유예로 가닥이 잡혔다. 회의는 한 시간 반도 채 되지 않아 짧게 끝났다. 문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회의 직후 강 장관이 일본 나고야에서 열리는 주요20국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지소미아를 종료할 거라면 강 장관이 참석하기 곤란한 자리였다. 이후 이상렬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대리가 주한 일본 대사관 관계자를 외교부 청사에서 만나 지소미아 종료 유예의 뜻을 담은 외교 공한을 전달했고, 오후 6시 양국이 동시발표하면서 유예의 효력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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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정석환 국방정책실장 면담을 위해 지난 6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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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결정의 뒤엔 미국이 있었다는 게 외교가의 상식이다. 21일(현지시간)부터 워싱턴에서는 “한ㆍ일 양국이 체면을 차리면서 지소미아 종료를 막을 수 있는 중재안이 통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19일부터 일본에서 외무성 당국자들을 만나 막판 설득 작업을 벌이던 중이었다.

22일 한ㆍ일의 발표는 미국이 7월 말 양국에 제안했던 동결 합의(standstill agreement)와 비슷하다. 한국은 지소미아를 건드리지 않고 일본은 추가 수출 규제를 멈추는 식으로 상황 악화를 일단 멈춘 뒤 대화부터 하자는 것이었다. 한국은 이를 환영했지만, 일본이 거부했고 결국 정부는 8월22일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했다.

미국은 이후 국무부 고위급 3인방과 국방부 고위급 3인방의 방한 등을 통해 한국을 압박하는 한편 막판까지 일본에 대해서도 한국이 결정을 번복할 명분을 줘야 한다는 취지로 설득을 계속했다고 한다. 22일 한ㆍ일이 합의한 지소미아의 조건부 유예는 사실 지난 6일 스틸웰 차관보가 방한했을 때부터 나온 아이디어였다. 당시에는 “공식적인 입장에 변화가 없다”며 유예 가능성을 일축했던 정부가 태도를 바꾼 데는 미국이 결국 일본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방미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21일(현지시간) 기자들과 만나 “최근 미국이 한국 측에만 입장 변화를 요구한 게 아니고 일본 측에도 입장 변화를 요구하며 지소미아와 관련해 한ㆍ일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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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일본 나고야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 회의 참석을 위해 2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이날 브리핑을 통해 지난 8월 일본 측에 통보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로 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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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이 움직인 데는 나름의 계산을 끝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외교가에서는 나온다. 한 전직 외교관은 “일본 입장에선 한ㆍ미ㆍ일 안보 협력의 핵심 기제인 지소미아를 살리기 위해 한 발 물러서줬으니 미국에도 할 말이 생겼고, 향후 한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를 활용할 수 있다”며 “사실 이번 합의는 다리 부러진 데 반창고를 붙인 모양새로, 본질적 측면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 양국에선 발표 직후부터 다른 말들이 나왔다. 외교부 당국자는 “강제징용 문제가 안 풀리면 수출 규제도 못 푼다는 일본의 연계전략에 우리는 수출 규제와 지소미아를 연결하는 전략으로 맞받았고, 그 결과 연결고리를 깼다고 생각한다. 오늘 발표문에 강제징용 내용은 없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모테기 도시마쓰(茂木敏充) 일본 외상은 “말할 것도 없이 지소미아와 수출관리 문제는 전혀 별개”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수출 관리에 대해선 한국으로부터 국제무역기구(WTO) 제소를 과정을 중단한다는 통고를 받았다”며 “현재 최대 과제와 근본적인 것은 구한반도 노동자(강제징용) 문제로, 한국에 대해 하루라도 빨리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해줄 것을 계속해서 강하게 요구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강제징용과 연계한 것은 물론이고, 수출 규제 관련 대화 개시도 한국이 WTO 제소 절차를 중단하겠다고 해서 응한 것이지 지소미아와는 상관이 없다는 논리다.

반면 청와대 국가안보실 김유근 1차장은 “한ㆍ 일 간 수출 관리 정책 관련 대화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일본 측의 3개 품목 수출 규제에 대한 WTO 제소 절차를 정지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화를 전제로 WTO 제소 절차를 정지했다는 조건부 정지로, 일본과는 정반대 논리다.

일본은 당장 지소미아의 효력 유지라는 ‘현찰’을 손에 쥐었는데,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수출 관리 정책 대화를 ‘현안 해결에 기여할수 있도록 한다’는 ‘어음’만 받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교부 당국자는 “발표문에는 없지만 일본의 화이트 국가(안보우호국) 관련 조치도 양국 간 수출 관리 정책 관련 대화의 의제”라며 “‘현안 해결에 기여할 수 있도록’이라는 일본 측 발표는 한국을 화이트 국가로 복원하는 방향으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금 시점에서 한국을 그룹 A(화이트리스트 국가)로 되돌리는 것을 전제로 결론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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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상이 22일 저녁 한국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종료를 '조건부 연기'한데 대해 일본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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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향후 일본이 성실히 대화에 응하지 않거나 시간을 끌 경우 WTO 제소 절차를 다시 진행하고, 지소미아도 종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이를 ‘안전장치’로 표현했다. 하지만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지소미아를 다시 종료하겠다고 나서는 게 한국 국익에 이득이 되는 안전장치가 맞냐는 반문이 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고민 끝에 일본에 공을 넘겼지만, 오늘 발표대로라면 일본이 만족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조건부 유예인 지소미아를 바로 종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정부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설명처럼 ‘강제징용-수출 규제-지소미아’ 3종 패키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정부가 지소미아에서 산소호흡기를 떼는 것을 유예하며 파국을 막았지만 한ㆍ미 간 신뢰 관계에는 흉터가 남았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이 '레드라인'으로 여겼던 지소미아를 건드리면서 한국이 한ㆍ미ㆍ일 안보 협력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다는 신호를 줬다는 것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정부가 상당 부분 양보하는 대승적 결단을 내린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돌이켜보면 8월 22일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해 결국 국격 손실을 불렀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유지혜·이근평 기자, 도쿄=윤설영 특파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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