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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정치인' 임종석의 시간은 거꾸로…"文과 2년, 인생 최고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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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김하늬 기자] [the300]불출마 선언 "제도권 정치 떠나 원래의 자리…통일 운동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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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진희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2019년 첫 국무회의에 임종석 비서실장과 함께 참석하고 있다. 2019.01.08. pak7130@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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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자신의 '정치 시계'를 20년 전 초심으로 돌린다. 첫 버튼은 21대 총선 불출마선언이다.

임 전 실장은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제도권 정치를 떠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고 사실상 불출마선언을 했다. 최근까지 '정치 1번지' 종로 출마가 유력하게 점쳐졌다. 만약 3선에 성공한다면, 특유의 친화력과 협상력으로 차기 집권여당 원내대표까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차기 유력한 여권의 잠룡으로 꼽혀왔다.

◇대통령 비서실장·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 '한반도 평화'에 총력= 임 전 실장은 문재인 정부의 시작과 함께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도 가장 높은 인지도와 호감을 함께 얻었다.

2016년 문재인 당시 후보의 캠프 비서실장으로 낙점되면서 특유의 친화력은 친문(文)이 아니면서도 캠프와 당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을 만들어냈다. 정권 교체 후 문재인정부 '초대·최연소' 대통령비서실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젊고 역동적인 청와대의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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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경기도 고양 킨텍스 프레스센터에서 회담 일정을 공개하고 있다. / 사진=고양(경기)=홍봉진기자 honggga@



특히 임 전 실장은 문재인정부 평화 프로세스의 핵심 인물로 역할을 다했다. 2018년 세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남북공동선언의 이행추진위원회를 직접 이끌며 한반도 평화와 남북 번영의 반석을 다졌다.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2차 북미정상회담 준비를 앞두고 청와대에서 임 실장과 만나 면담을 하기도 했다. 미국도 임 전 실장을 핵심 '메신저'로 활용했다는 의미다. 비건 대표측이 임 전 실장 면담을 직접 요청해 북미 접촉에 앞선 사전조율의 적임자로 신뢰했다는 평가다.

임 전 실장은 직무상, 또 남북관계 개선에 실질적 역할을 하는 면에서도 그 위상이 확고했다. 왔다. 이날 불출마 선언문에서 밝힌 "예나 지금이나 저의 가슴에는 항상 같은 꿈이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의 공동번영이다" 고 언급한 부분과 통하는 지점이다.

◇정치판에선 부침.. 총선공천 등 쓴잔= 문재인 정부에 합류하기 전까지 임 전 실장의 정치인생은 파란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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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총선 당시 임종석 전 실장의 선거운동 포스터 /사진=머니투데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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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는 화려했다. 소위 '운동권 간판 얼굴'이었던 임 전 실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 피 수혈론'에 따라 민주당에 입당한 뒤 2000년에 만 34세의 나이로 16대 국회의원이 됐다.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대책위원회 국민참여본부 사무총장으로 승리에 기여했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국회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탄핵을 저지하는 모습이 국민들 뇌리에 박히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일던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서울 성동(을) 지역에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출마, 재선에 성공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시련은 그 이후 찾아왔다.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에 나선 18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후보에게 석패했다. 한명숙 전 총리가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이던 시절 대변인으로 두터운 신임을 얻은 뒤 2012년 4·11 총선(19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 대표로 당을 진두지휘하게 된 한 전 총리가 임 비서실장을 후보 공천을 조율하는 사무총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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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과 정무부시장을 지낸 임종석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 /사진=머니투데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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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임 실장은 저축은행 비리 사건과 관련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1심에서 유죄(징역 6월·집행유예 1년)를 받은 상태였다. '정치 검찰의 희생양'이란 평가와 '비리 인사'라는 비판이 혼재했다. 결국 총선 공천과 당내 계파를 둘러싼 갈등이 공천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에게 향하면서 한달 반만에 자진 사퇴했다. 총선 출마의 뜻도 접었다.

공교롭게 당시 한명숙 대표에게 임 실장의 공천을 철회하라고 요구한 것이 문 대통령이었다. 법정 공방 끝에 2014년에 이르러서야 임 실장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재기는 박원순 서울시장을 통해 이뤄졌다. 박 시장은 임 실장을 2014년 6·4 지방선거 캠프 총괄팀장으로 영입했다. 당선 후에는 서울시 정무부시장까지 맡아 시정 경험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문 대통령에게 영입될 때까지 그는 '박원순맨'으로 분류됐다.

◇임종석이 말하는 '원래의 자리'…통일 운동 = 임 전 실장은 1986년 한양대 무기재료공학과에 입학해 1학년 때부터 민중가요 동아리에서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한양대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1989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 의장에 뽑혔다. 수려한 외모를 가진 덕에, 여학생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으로 꼽히기도 했다. 운동권 스타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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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활동 당시 임종석 전 실장의 모습 /사진=머니투데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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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별명은 '임길동'이었다. 경찰의 지명수배망을 뚫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모습에 붙어진 별명이었다. 수배기간 동안 내외신과 진행한 기자회견만 10번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경찰의 포위망을 비웃는 듯한 모습에 대학생들은 열광했다. 그와 같은 시대에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청와대 비서실장 임종석이 아닌, '임길동'을 먼저 떠올릴 정도다.

특히 1989년 6월 당시 이른바 '임수경 방북사건'을 주도해 유명세를 탔다. 한국외대 학생이었던 임수경 전 민주당 의원이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그해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제'에 참석한 사건이다. 노태우 정권이 '불허'했지만 임 전 실장과 전대협은 제3국인 일본, 독일을 거쳐 임 전 의원을 평양으로 보냈다.

임 전 실장은 2008년 자신의 책에서 "무기징역을 받아 더이상 바깥세상 구경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비장한 심정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 사건으로 전대협 간부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임 실장은 3년6개월 간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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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는 임종석 전 실장. /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이런 이력 때문에 이른바 '주사파'(주체사상파)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과거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내가 아는 임종석은 더 이상 주사파가 아니다"고 밝혔다. 하 의원은 "임 (전) 실장이 저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통일맞이' NGO(비정부기구)를 같이 했는데, 맹목적인 주사파 비판을 임 실장이 했다"고 밝혔다.

임 전 실장은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남북교류, 평화경제 분야 정책 전문성을 인정받는 배경이다. 참여정부 시절 개성공단 지원법 입법을 주도하기도 했다.

임 전 실장은 이날 총선 불출마를 밝히면서 끝으로 "한반도 평화와 남북의 공동번영. 제겐 꿈이자 소명인 그 일을 이제는 민간 영역에서 펼쳐보려 한다"며 "서울과 평양을 잇는 많은 신뢰의 다리를 놓고 싶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출마는 포기하지만 '정치인' 임종석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김하늬 기자 hone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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