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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평균나이 65.3세, 꿈에만 그리던 '수능'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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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조해람 기자] [만학도, 수능 보다①]"배움 그만뒀는데, 꿈만 같았다"…수능 치른 세 만학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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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수능을 치르고 온 '만학도 수험생' 셋을 15일 서울 일성여중고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이경랑(56), 이무선(71), 이만복(69)/사진=조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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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본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가슴이 콩닥댔다."(이경랑·56)


배움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었다. 딸이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학교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소녀들도 많았다. 그들은 이른 나이에 생업에 뛰어들거나, 오빠와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했다. 학교와는 점점 멀어졌다. '팔자'가 아닌 줄로 알았다.

그런 그들이 지난 14일, 수능을 봤다. 중·고등학교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인 서울 일성여자중고등학교 덕이었다. 평균 나이 65.3세. 손주뻘 수험생들과 같은 날 수능을 치른 '만학도 고3' 이경랑씨·이무선씨(71)·이만복씨(69)를 수능 다음날인 15일 서울 일성여중고에서 만났다.


"세월 흐르고 아이 낳고…어느새 '나'는 2순위였어요"



배움을 그만둬야 했던 사정은 모두 비슷했다. 이무선씨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10대 후반, 우연히 한문책을 구했다. 소를 먹이러 다니며 매일 8자씩 꼬박꼬박 한문을 외웠다. 그러나 상급학교를 가지는 못했다. 이만복씨는 "그땐 딸은 농사만 짓다가 시집 가면 끝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시대 상황이 그랬으니 원망도 못하고, 언젠가는 공부를 꼭 하겠다는 마음만 품고 살았다"고 회상했다.

이만복씨는 "세월은 저절로 흘러가니까. 아이들 갖고 그러다 보니…내 삶에서 '나'는 2순위였다"며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서 학교에 온 게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생각해 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검정고시 교본인 이른바 '강의록'을 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니 공부는 얼마나 힘들었겠냐"라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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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서울 일성여중고 복도에 각종 시험 합격자 공지가 붙어 있다. 이선재 일성여중고 교장은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 여러 분야의 시험을 만들고, 점수를 낸 학생에게는 모두 상을 준다./사진=조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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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들에게 수능은 더 각별했다. 셋 모두 이미 수시로 합격을 했지만, '정시냐 수시냐'를 떠나 수능을 보는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이무선씨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며 "자녀들만 수능을 치르는 줄 알았는데, 감개무량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경랑씨는 "처음에 앉아 있는데 (긴장이 돼) 가슴이 뛰었다"며 "(동기들끼리) 한문시험을 잘 봐서 선생님께 칭찬받자며 시험을 봤다"고 웃으며 말했다.


"50년 전 남동생이 배우던 그 시, 교실에서 배우다가 울었어요"

수능뿐만이 아니다. 다시 펜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겐 감동이었다. 이무선씨는 국어시간에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읽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어린 시절, 대구에서 자취하던 고등학생 동생을 뒷바라지할 때 어깨너머로 외운 시였다. 이무선씨는 "선생님이 '국화 옆에서'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봐 손을 들었다"며 "일어나 읽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배움에 대한 열정도 10대 학생들 못지않다. 이만복씨는 "새로운 것을 배워가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면서도 "여기 모두 '1인 3역'씩 하는 사람들이다. 실컷 자고 공부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이경랑씨는 "수능을 잘 보고 싶었는데 주부인데다 남편 일도 도와야 해 시간이 아쉬웠다"면서도 "전날 겨우 한문과 한국사 책을 훑어본 게 도움이 됐다"고 귀띔했다.


'65세 수험생'들이, 손주뻘 수험생들에게



이들은 같은 날 수능을 본 '손주뻘 수험생'들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입을 모았다. 이만복씨는 "우리는 뒤늦게 기회를 잡았지만, (젊을 때와) 손바닥에 닿는 감이 다르다"며 "기회는 항상 있겠지만, 똑같은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매번 다른 기회가 왔을 때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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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수능시험을 마친 한 수험생이 지난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여고 고사장을 나서며 가족과 포옹하고 있다./사진=김휘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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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선씨는 노인복지학과에, 이만복씨는 일문과에 진학할 예정이다. 둘 다 수시로 합격했다. 이경랑씨는 2곳에 합격했지만 헬스휘트니스 관련 학과를 가고 싶어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이만복씨는 "기대가 많다"며 "학교에 가면 나이는 어려도 선배는 선배다. 선배들에게 물어봐서 좋은 책이나 지식, 컴퓨터 활용 등을 배우고 싶다"고 밝혔다.

이경랑씨는 "대학도 대학이지만, 사회가 우리 만학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으면 좋겠다"며 "취미로 공부한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니다. 청소년 학생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도 배려와 관심을 가져 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조해람 기자 doit92@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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