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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 불시착했나... 외계행성 같은 고성 시간여행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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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거슬러 올라가는 고성여행/감 익는 마을 ···예스러움에 빠지다/봉우리 둘러싸인 왕곡마을, 전통한옥·초가집 그대로/감나무 주렁주렁 향수 자극/영화 ‘동주’ 촬역지선 ‘별헤는 밤’ 시인의 짧은 삶 눈앞 스쳐/파도야, 세월아 ‘작은 금강산’ 비경 빚었구나/신생대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독특한 지형 많아/곳곳에 국가지질공원···외계 행성 온듯 기묘한 풍경



어린 시절 경기도 포천의 외가 마당에는 신기한 게 하나 있었다.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 펌프인데 마중물을 조금 넣어 손잡이를 위 아래로 움직이다 보면 물이 콸콸 쏟아졌다. 여름 방학 때면 외할머니가 그 물로 등목을 해주던 기억도 난다. 등을 타고 흐르는 지하수는 어찌나 차갑던지 소름이 쫙 끼치며 더위가 싹 물러갔다. 가을이면 초가 한쪽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대봉이 탐스러운 붉은빛으로 물들고 외할머니를 졸라 잘 익은 대봉을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강원 고성군 왕곡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마을 전체가 주황색 감으로 채색되고 있다. 세월이 멈춘 듯 어린 시절 외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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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마을 입구 왕곡마을 전경


#감 익는 고성 왕곡전통마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니.” 신념에 따라 거침없이 행동하는 몽규는 동주의 가슴에 비수 같은 말을 던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던 시인 윤동주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의 얘기를 다룬 영화 ‘동주’의 한 장면이다. 왕곡마을을 찾은 이유가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 속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 때문이다. 영화의 무대는 북간도 용정이지만 실제 왕곡마을에서 촬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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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가 지천으로 자라는 왕곡마을


‘왕곡마을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인사하는 입구에는 수령 150년이 넘는 소나무들이 여행자들을 반긴다. 해변과 불과 1㎞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마을은 고요하다. 이유가 있다. 야트막한 봉우리 다섯 개가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어서다. 왕곡마을의 행정구역 이름이 ‘오봉리’인 까닭이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초가와 기와집들이 펼쳐지는데 아주 오래전 마을의 모습 그대로 잘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 마을을 둘러싼 봉우리들이 폭격을 막아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윗마을에는 양근 함씨, 아랫마을에는 강릉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지금도 5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왕곡마을의 역사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 1394년 폐위돼 유배된 곳이 고성의 간성이다. 이때 공양왕을 따라 나선 이가 우왕 때 홍문박사와 예부상서를 지낸 함부열. 그는 공양왕이 유배된 지 2년 만에 살해당하자 공양왕이 머문 것으로 전해지는 수타사 아래 왕곡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고 그의 후손들이 이곳을 지키게 됐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함부열의 21대손 함정균씨가 사는 가옥(강원도 문화재자료 78호)을 만난다.

여름에는 크고 화사한 접시꽃이 반기지만 깊어가는 가을, 왕곡마을을 가슴 깊이 아로새기게 만드는 것은 감나무다. 모든 집에 감나무가 심어져 있고 길에도 감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배고픈 까치들의 밥이 되어준다. 초가의 누런 지붕과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오봉의 울긋불긋한 단풍, 그리고 지천으로 깔린 감나무의 가지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길에 닿을 듯 축 늘어진 모습은 완벽한 가을풍경을 선사한다. 마침 길에 잘 익어 보이는 대봉 하나가 뚝 떨어지기에 냉큼 집어 반으로 갈라 한입 베어 문다. 달달하고 촉촉한 과즙이 입 안 가득 ‘만추’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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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 촬영지 큰상나말집


여행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영화 속 동주의 집으로 등장한 ‘큰상나말집’이다.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동주와 몽규가 가족과 기념촬영을 하는 장면이 눈앞을 스친다. 그 사진을 찍는 순간까지가 동주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으리라. 이후 그의 생에는 일제 치하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수많은 고난의 시간들이 찾아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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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마을 항아리 굴뚝


왕곡마을은 방과, 마루, 부엌, 외양간이 모두 연결된 강원도 북방식 가옥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ㄱ’ 자형 안채와 행랑채로 구성된 큰상나말집이 대표적이다. 폭설이 내려도 집이 고립되지 않도록 기단을 높이고 지붕은 급경사로 만들어 눈이 쌓이지 않도록 했다. 집앞에 대문과 담벼락이 없는 점도 독특하다. 마당과 방으로 햇살을 가득 들여 일조량을 높이기 위한 디자인이란다. 반면 집 뒤와 양옆은 담장을 길게 쌓아 차가운 북서풍을 막았다. 큰상나말집 행랑채 앞에는 물을 길어 올리는 옛 펌프와 우물터가 남아 있는데 동주와 몽규가 목물하는 장면이 여기서 촬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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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마을 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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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정미소


마을이 그리 크지 않아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둘러봐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 집집마다 독특한 항아리 굴뚝이 눈에 띈다. 열기가 집밖으로 쉽게 나가지 않도록 하고 초가로 옮아 붙어 화재가 나지 않도록 고안했다니 옛 사람의 지혜가 대단하다. 마을을 돌아 나오는 길에 동주와 몽규가 잡지를 만들고 시를 읽던 아지트 왕곡정미소와 그네도 그대로 있다. 여유가 있다면 하룻밤 머물며 윤동주의 시처럼 ‘별 헤는 밤’을 보내보자. 저렴한 비용으로 민박을 하며 가을 정취에 푹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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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산 현무암 지대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듯 신생대를 마주하다

왕곡마을을 떠나 아주 멀고 먼 ‘과거’로 떠난다. 고성에서 왕곡마을은 아주 ‘최근’에 속한다. 신생대 활동으로 생긴 동해안 지형과 지질의 발달 과정을 잘 보여주는 국가지질공원이 곳곳에 있어서다.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 문암교를 건너 우회전해 무릉도원로로 접어들면 도로가 끝나는 곳의 군부대 인근에 운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온다. 돌산인 데다 경사가 매우 가팔라 난도가 최상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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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산 오르는 길


10분을 오르자 땀이 줄줄 흐르는데 퇴직 교장 출신 해설사는 일흔의 나이에도 성큼성큼 뛰듯이 돌산을 오른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15분쯤 오르다 오른쪽 작은 길로 접어들었는데 순간 눈을 의심케 한다. 마치 화성에 불시착한 듯하다. 직경 30㎝가량의 현무암과 화강암 덩어리들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어서다. 돌무더기 위로 올라가 사진을 찍으니 영락없이 구조 우주선을 기다리는 SF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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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산 현무암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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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산 주상절리 상단 모습


지하 1600m의 모습이란다. 화산폭발 때 거대한 기둥 모양의 현무암과 화강암이 솟아올랐는데 빙하기를 거치며 무너져 내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풍경을 선사했다. 사진을 찍다 휴대전화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들 수 없는 돌덩어리 사이로 빠지면 절대 찾을 수 없다. 제주도의 현무암은 기포가 빠져나가 가벼워졌지만 이곳은 무거운 물질이 그대로 담긴 채 굳어졌다. 실제 한 업체가 돌을 채굴하기 위해 허가를 받았지만 얼마 못 가 포기했다고 한다. 더구나 돌무더기들은 땅속 깊은 곳까지 이어진다고 하니 그 거대함에 혀를 내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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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바위 해안가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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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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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어바위


#억겁의 세월 파도가 빚은 비경

가파른 운봉산을 내려서니 무릎이 아파오지만 근처에 군사지역으로 통제됐다 지난해 일반인에게 개방된 숨은 비경이 있다는 말에 솔깃해 해안으로 향한다. 서낭바위인데 역시 다른 해안에서 찾기 힘든 기암괴석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기묘한 풍경을 만드니 여기가 지구인지 의심스럽다. 복어를 영락없이 닮은 복어바위, 부처바위와 작은 돌이 착착 달라붙는 자석바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강암 사이에 두 줄의 붉은 암석이 끼여 있는 서낭(성황)바위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용 두 마리가 지나간 신성한 바위로 여겨진다. 화강암이 압력으로 금이 가고 그 사이에 규장질 마그마가 파고들면서 독특한 바위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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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파대


인근 능파대는 대규모 타포니 군락지다. 파도가 억겁의 세월 동안 암벽을 때리면서 침식작용으로 기괴한 구멍을 만들어 고성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을 선사한다. 1억8000만년전에 형성된 화강암지대인대 바다빛이 코발트블루의 바다색이 아름다워 사계절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고성=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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