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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커버스토리]풍등을 띄웠고, 저유소가 터졌다…그 쉼표 사이 ‘무수한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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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저유소 화재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디무두는 풍등을 날리기 전까지는 잘 웃고 꿈 많은 평범한 청년이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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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7일 일요일, 하루의 시작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디무두(28)는 오전 5시40분쯤 숙소에서 일어나 스리랑카인 동료 키산과 8개월째 일하는 현장으로 갔다. ‘서울~문산 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1-1공구’ 현장. 다른 작업을 하다가 터널 위로 올라간 게 오전 10시쯤이었다.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라고 쓰인 풍등이 눈에 띄었다.

쉬는 시간, 풍등을 가져왔다. 그을린 심지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여 띄우니 풍등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전기창고 안에서 쉬던 키산을 불렀다. “풍선 올라간다.” 풍등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던 디무두는 깜짝 놀랐다. 풍등은 빠르게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풍등을 따라 뛰었다. 멀리서 불씨가 꺼진 풍등이 낙하하고 있었다. 숲 너머로 떨어지고는 보이지 않았다. 디무두는 쉼터로 돌아가 평상에 누웠다. 10시37분14초.

펑. 18분쯤 지났을까. 덤프트럭의 타이어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폐쇄회로(CC)TV에 진동이 감지됐다. 10시54분09초.

디무두가 풍등을 처음 본 건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다. 효명세자 이영(박보검)이 남장내시 홍내관(김유정)과 풍등을 날리는 장면이 나온다. 소원을 적어 날린 풍등은 밤하늘의 별처럼 가득했다.

풍등이 날아가 떨어진 곳은 2001년 민영화된 대한송유관공사의 저유소였다. 풍등은 기름을 보관하는 저유탱크 근처 잔디밭에 떨어졌다. 건초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발화되고 20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불은 17시간 만에 진화됐다. 4기의 저유탱크가 파손돼 수리 비용이 71억4000만원으로 추산됐다. 폭발한 303C 탱크에 보관 중이던 40억2735만원 상당의 휘발유 2820㎘도 타버렸다. 111억6735만원 상당이다.

디무두는 비전문취업비자(E9)를 받아 2015년 5월 한국땅을 밟았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는다는 얘기를 종종 듣던 청년은 그날 이후 자주 운다. “평생 벌어도 못 벌어요. 500년 걸려요. 계산해봤어요.”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 1년…함께 싸우는 디무두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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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서울~문산 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1-1공구’ 강매터널 공사 현장은 한강으로 흐르는 창릉천과 해발 91m쯤 되는 봉대산, 그 옆의 온굴안산의 중턱을 따라 난 외진 곳에 있어 밤이 되면 어둠이 깊게 깔린다. 강매터널 공사 관리부장 김모씨는 지난해 10월6일 밤 10시쯤 담배를 사러 나섰다가 하늘에 떠있는 빨간 불빛 수십 개를 목격했다.

한 현장 관계자는 강매터널 공사장 뒷산에는 대공포가 숨겨져 있다고 했다. 한강을 따라 자유로가 지나는 길목, 서울로 가는 항공로가 있는 곳이라 북한의 침투를 대비해 배치됐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씨와 함께 가게 옆에서 빨간 불빛을 본 노인은 “전쟁난 거 아니야”라고 반응했다. 김씨는 다음날 터널 위쪽에 떨어진 빨간 봉지 같은 것을 봤다. 하지만 현장 인근 고양저유소가 폭발하고 경찰의 조사가 시작될 때까지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10월8일 오후 8시, 저녁뉴스에 “풍등 날린 스리랑카인 긴급체포”가 첫 소식으로 보도됐다. 오후 7시20분쯤 경찰이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인을 긴급체포했다’고 밝힌 것을 보도한 것이다. “이맘때쯤 동남아인들이 복을 빌며 풍등을 날리는 풍습이 있는데 경찰은 용의자가 밤이 아닌 오전에 풍등을 날린 이유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2001년 민영화된 대한송유관공사가 관리하는 고양저유소. 이곳에서 직선거리로 800m 떨어진 곳에 있는 ㄱ초등학교의 교감 ㄴ씨는 뉴스를 보고 다급히 112를 눌렀다. “제가 뉴스를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어제 ‘저장고’ 화재요. 풍등을 우리 학교에서 날렸거든요. 토요일 저녁 10시에 학교 행사로 날렸어요. 스리랑카인이 긴급체포됐다는데, 그 사람하고는 관련이 없을 것 같아요.”

경찰은 이날 오후 2시55분쯤, 스리랑카인 노동자 디무두 누완(28)을 긴급체포해 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경찰이 화재의 원인으로 지목한 풍등이 학교에서 날아온 것이란 걸 확인했다.

경찰은 풍등이 날아가고 공사 관계자가 뛰어가는 장면 등이 포착된 CCTV 영상을 근거로 강매터널 현장에 갔다. 화재 당일 근무자를 모이도록 한 뒤 해당 영상을 보여줬고, 최종적으로 디무두가 지목됐다. 처음에 디무두는 “저 아니에요”라고 했다. 영문을 몰랐고 무서웠다. “풍등 보고 뛰어갔잖아. 너 맞잖아.” 경찰이 다그쳤다. 디무두는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된다는 현장소장의 말을 믿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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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제시한 증거 경기 고양경찰서 관계자가 지난해 10월9일 고양저유소 화재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공사현장에서 발견한 풍등을 펼쳐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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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디무두에게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변명의 기회가 있다는 미란다 원칙을 설명했다.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스리랑카어로 된 미란다 원칙을 보여줬다. 정확히 이해가 안 됐지만 큰일이 난 것 같았다. 풍등을 날린 건 맞지만, 불이 났다니 믿을 수 없었다.

구치소 안에서 본 TV에선 익숙한 장면이 언뜻 비쳤다. 8개월가량 일한 공사현장, 커다란 불길, 경찰이 보여준 CCTV 영상. 누군가 채널을 돌렸다. 경찰은 풍등이 떨어져 불이 났고 저유소가 폭발했다고 알려줬다. “지금 심정이 어떤가요.” 체포 당일 오후 9시쯤 시작된 첫 피의자신문 끝에 경찰이 물었다. 조서에 적힌 디무두의 대답은 이랬다. “저는 죽었다는 심정입니다. 일부러 한 일이 아닙니다.”

■ 의기투합

디무두는 2015년 5월 아시아나항공기를 타고 싱가포르를 경유해 한국에 왔다. 태어나 처음 타는 비행기였다. 고향 산골마을에서 한국에 온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친구를 따라 한국어를 공부해 먼저 취업 자격을 얻었다. 한국에 와선 주로 터널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철근공’이라고 불린다. 현장 기술자나 숙련공을 옆에서 돕는 일을 한다. 경험과 기술이 없다면 한국인도 디무두와 비슷한 일을 하게 된다. 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건 인건비가 싸기 때문이 아니다. 현장 사람들은 ‘한국인들은 고된 현장에서 아무도 일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경험 많은 한국인 직원들은 대부분 40~50대 중년 남성이다.

많은 스리랑카 청년들이 해외로 나가 일자리를 구한다. 디무두가 한국에 온 뒤 두명의 친동생도 형을 따라 한국에 왔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한국을 선호한다고 했다. 한국에 오면 공사 현장 등에서 힘든 일을 하지만 그래도 본국보다 벌이가 좋았다. 한국인보다 조금 적은 월급을 받지만, 한 달을 채 못 채우고 받은 디무두의 첫 월급은 스리랑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스리랑카에서 디무두는 그나마 수입이 좋은 트럭운전을 했다. 한 달에 70만원쯤 벌었다. 여느 일자리는 한 달 수입이 30만~40만원 정도다.

디무두는 집이 가난해 고교 1학년을 3개월만 다니고 그만뒀다. 군인이 될까 했지만 평생 제대하지 못 할 것 같아 포기했다. 부모님은 찻잎을 따거나 고무를 만드는 농장에서 일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몸이 안 좋다. 지금도 약값으로만 한 달에 20만원 정도 쓴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온 디무두가 한국에 온 것도 돈 때문이었다.

한국에 올 때 세워둔 계획이 있었다. 성실하게 돈을 모아 고향에 땅을 사 집을 짓고 싶었다. 꿈과 목표를 가지고 한국에 왔기에 열심히 일했다. 어쩌다 여유가 생기면 롯데월드에 갔다. 거기서 롤러코스터를 탄 일이 한국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다. 흥이 많은 디무두는 스리랑카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큰 맘 먹고 전자드럼과 음향장비도 샀다. 명절이면 동생들과 스리랑카 친구들이 숙소에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이 모습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더 이상 연주를 하지 않는다.

10월9일 오전 8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노동위원회 이주노동팀 변호사들이 모여있는 텔레그램 단체대화방이 울렸다. 한글날이었던 이날 동기들과 광화문 인근에서 약속을 잡아두었던 이경재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제가 가도 되나요?”라고 답변을 올렸다. 디무두를 접견할 변호사를 찾는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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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저유소 화재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디무두를 위해 변론전략을 준비하는 공동변호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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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호사는 걱정이 되긴 했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지 6개월이 안 넘은 신참이기도 했고 체포된 스리랑카인의 이름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형사 사건은 맡아본 적도 없었다. 실무수습 기간이라 재판에도 못 나가는데 괜히 갔다가 무슨 소리를 듣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경찰서에도 처음 가봤다. 다행히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의 서채완 변호사가 동행했다. 오후 1시쯤 강남의 사무실에서 위임장을 준비한 뒤 서 변호사를 만나 일산으로 향했다. 수사를 맡은 고양경찰서에는 유치장이 없어 디무두는 일산동부경찰서에 있었다.

경찰서에는 김대권 아시아의친구들 대표가 먼저 와있었다. 김 대표는 경기 파주와 일산 쪽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다. 두 변호사와 김 대표는 이날 처음 만났다. 제대로 인사할 겨를도 없이 우선 변호사들이 디무두를 만나기 위해 ‘변호인이 되려는 자’의 자격으로 접견을 신청했다. 어느새 늦은 오후였다.

평소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들은 ‘스리랑카인 체포’라는 뉴스 키워드 하나로 의기투합했다. 피의자 지원을 위해 10여명의 변호사와 시민단체 활동가가 텔레그램 대화방을 꾸렸다. 디무두가 체포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다. 구속영장이 신청될 것으로 보여 빠른 대응이 필요했다. 대형사고가 터졌으니 언어가 서툰 외국인 노동자가 희생양으로 몰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세상 혼자인 줄 알았던 디무두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디무두는 자신을 찾아온 변호사들을 보고 반신반의했다. 스리랑카에선 변호사를 쉽게 믿지 않는다고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디무두를 향해 말했다. “도와주려고 왔어요. 우리는 NGO예요.”

■ 석방

이경재·서채완 변호사가 디무두의 인적사항을 확인한 뒤 김대권 대표가 이어 면회를 신청했다. 김 대표는 화성외국인보호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오랫동안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활동도 해왔다. 김 대표는 디무두를 안심시키기 위해 평소 도움을 주고받으며 알고 지내는 스리랑카인 얘기를 꺼냈다. 마음을 놓은 디무두가 속에 있는 말을 두서없이 꺼내놓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어떻게 된 거예요? 변호사 돈은 얼마나 내야 해요? 부모님이랑 동생들이 나 여기 있는지 알아요? 동생들은 오지 말라고 해요.’

김 대표는 디무두가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었다는 점에 일단 안심했다. 그리고 불교도라는 점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가 풍등을 날려 체포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외국인 혐오의 대상이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체류자격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거나 무슬림이었다면 여론의 향방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체류 신분과 종교는 사건의 본질과 상관이 없지만, 수사의 강도나 여론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디무두에 대한 동정론이 커지자 대한송유관공사 한 관계자는 경찰 조사에서 “국민여론에 의해 스리랑카인에게 동정심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이 사건과 같이 큰 화재의 원인 제공자는 법에 의해 처벌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이 디무두를 만나고 돌아온 다음 날 새벽, 경찰서에서 서 변호사에게 급히 연락을 했다.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추가 조사를 하라는 검찰의 수사 지휘가 내려와서 오전 일찍 조사할 거라는 얘기였다. 동석 여부를 묻는 질문에 서 변호사는 곧장 텔레그램 대화방에 이 일을 알렸다.

신하나 변호사(법무법인 덕수)가 10일 오전 6시30분쯤 황급히 집을 나섰다. 오전에 있을 디무두에 대한 2차 피의자 조사에 동석하기로 해 급히 위임장 작성을 해야 했다. 강남역 인근 사무실을 나서다 급한 마음에 그만 계단에서 크게 넘어졌다. 디무두가 긴급체포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체포 기간이 만료되는 날이자, 구속영장이 청구될지, 석방될지 결정될 날이었다. ‘왠지 기각될 것 같은데.’ 아픈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면서도 불현듯 이런 생각이 스쳤다.

신 변호사의 예상대로 이날 디무두는 풀려났다. 검찰은 디무두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았다. 중실화 혐의를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중실화는 사실상 고의에 가까운 실수에 해당된다. 풍등을 날렸다는 것만으로 구속 사유에 해당하기 힘들다고 본 셈이다. 외국인이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변호사들은 말했다.

유치장 밖으로 나오기 전 디무두가 다니는 회사의 자문 변호사인 이석우 변호사(법무법인 으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며 그를 다독였다. 이 변호사는 회사에서 디무두를 위해 선임해줬다. 일정이 있던 민변 변호사들은 이날 현장에 오지 못 했다. 일산동부경찰서 앞에는 수십명의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디무두는 그제야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수십개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겹겹이 둘러싼 취재진을 뚫고 나오기 쉽지 않았다. 이 변호사는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버리고 회사 관계자들과 경찰서를 빠져나와야 했다. 석방 이후에야 디무두는 사건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경찰서 안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다치지는 않았을까 내내 가슴을 졸였다. “얼마나 큰 사고인지 몰랐어요. 사람 다치면 안 돼요. 걱정됐어요. 돈은 지금 다시 벌 수 있어요. 사람 다쳤으면 큰일이에요.”

사흘 만에 고양시 행신동의 숙소로 돌아왔다. 지방에서 일하던 친동생 둘과 친구, 동료 등 10명이 넘게 찾아왔다. 숙소에 다 들어오지 못해 먼저 돌아가는 이도 있었다. 스리랑카 현지에서도 사건이 보도됐다고 했다. 디무두는 먼저 스마트폰을 들어 영상통화를 시도했다. 화면에는 엄마가 나왔다. 동생도 울고 디무두도 울었다. 디무두는 “엄마가 우니까 계속 울었다”고 했다.

|법정에 선 디무두는 묻고 싶다…“내가 정말 실화죄를 지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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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 지난해 10월7일 오전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대한송유관공사의 휘발유 저장탱크가 화재로 폭발해 소방헬기가 진화에 나서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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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장

디무두가 석방된 뒤 변호사들은 한시름 놓았다. 구속을 피한 건 큰 성과였다. 만약 구속됐다면 수사 기관의 조사 방향에 따라 디무두는 그들이 원하는 답변을 내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잘못한 게 없더라도 외부와의 접촉 없이 수사기관의 조사를 장기간 받게 되면, 고향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기 위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허위자백도 해버리는 게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석방 나흘 뒤인 10월14일 오전, 변호인단 멤버인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와 서채완·신하나 변호사, 김대권 대표가 디무두의 숙소를 찾았다. 다른 스리랑카 노동자들과 기숙사로 쓰던 빌라였다. 문을 두드리자 디무두가 빼꼼 열어 밖을 살폈다. 숙소 앞에서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 초기부터 변론 전략을 짜며 함께한 최 변호사는 10년 이상 이주노동자를 위한 변호 활동을 해왔지만 언론의 취재 욕심에 사실상 집안에 감금됐던 디무두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디무두는 유치장에서보다는 나아보였지만, 수면제에 의지할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여전히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의 무게감에 압도된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스리랑카로 쫓겨나는 건 아닌지,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지 등 근심이 계속 됐다.

변호사들은 디무두와 명절이나 휴일에 따로 만나 삼겹살이나 스리랑카 음식을 나눠 먹으며 관계를 다졌다. 변호사들의 눈에 비친 디무두는 20대 후반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가난한 나라 출신 노동자라는 편견을 거두면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즐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청년이었다.

지난해 11월15일 경찰에서 마지막 조사(4차)를 마친 날 디무두는 수사 확인서에 ‘디무두 인’이라고 새겨진 도장을 찍었다. 그전까지는 도장이 따로 없어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지장을 찍었다. 도장은 10월31일 있었던 3차 피의자 신문 이후 이경재 변호사가 만들어준 것이다. 수사 대상이 되면 조서와 수사 확인서 등에 지장이나 도장을 찍는다. 서채완 변호사는 청소년들이 수사 기관에서 지장을 찍은 경험을 공포스러워하며 힘들어했다는 선배 변호사의 말이 생각나 도장을 파자는 제안을 했다.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석방 이후 변호사의 조력을 받게 되자 많은 게 달라졌다. 긴급체포 직후 변호인 없이 받은 1차 피의자 신문 조서엔 디무두가 경찰 조사관의 질문에 무력하게 자백하는 듯한 대목이 많이 나온다. “주변에는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는 공사현장, 나무숲, 석유저장소 등이 있어 풍등을 날리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나요?” “예” “피의자가 풍등을 날리고 풍등이 떨어질 때 불이 붙어있고, 떨어진 풍등으로 인해 잔디가 타고, 이후 18분 만에 저장탱크에 불이 붙은 장면을 확인하였나요?” “예” “피의자가 날린 풍등에 의해 불이 난 것을 인정하는가요.” “예.”

최정규 변호사는 변호인이 동석해 받은 2차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1차 때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1차에서는 저유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진술한 것처럼 조서가 쓰여있었고, 풍등을 찾지 못해 쉼터로 돌아오는 모습은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치는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디무두는 2차 조사 때부터 명확히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고 나서부터 비로소 제 목소리를 겨우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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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확보한 고양저유소 폐쇄회로(CC)TV 영상에 포착된 디무두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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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조사과정에서 123차례나 ‘거짓말하지 말라’며 자백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국가인권위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신문조서엔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닌가요”라며 점잖은 질문을 한 것처럼 돼 있지만 실제론 달랐다고 했다. 변호사들이 옆에 앉아있는데도 “계속 거짓말이냐”고 압박했다. 디무두의 시력, 한국어 실력, 운전면허 취득 여부 등이 모두 저유소의 존재와 위험성을 알면서도 풍등을 날렸으며, 풍등이 저유소 안에 떨어졌는데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됐다.

하지만 검찰은 경찰이 송치한 중실화 혐의에 대해 불기소 결정했다. 풍등을 날린 행위를 중과실로 볼 수 없고, 디무두가 풍등의 낙하지점과 발화사실을 알았다고 볼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대신 검찰은 지난 6월28일 디무두를 실화죄로 재판에 넘겼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디무두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회사의 도움도 한몫했다. 디무두를 고용한 건설업체 금풍건설이엔씨(금풍)는 자문변호사를 선임해 민변 소속 변호사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했다. 금풍이 디무두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선 데에는 나용환 대표의 개인적 경험의 힘이 컸다. 30대였던 1980년대 후반 대우건설에 몸담았던 나 대표는 가족들과 떨어져 말레이시아 파견근무를 한 적이 있다.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일하며 느낀 외롭고 고됐던 기억이 생생했던 나 대표는 디무두를 돕자고 현장 직원들을 독려했다. 숙소나 식사를 제공해 최소한 생계는 걱정하지 않도록 했다. 나 대표는 “회사의 같은 동료라서 지원하는 것이지 특별히 외국인이라서 도와주는 건 아니다. 다른 직원이 같은 상황이었어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디무두는 “사장님도 소장님도 변호사님도 도와주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한국 사람들한테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저유소 폭발 이후 한동안 공사 작업을 중지해야 했고 심지어 압수수색을 당하고 참고인 조사에 불려다녔지만 ‘너 때문이다’라고 손가락질하는 동료는 한 사람도 없었다. “건설 기술도 많이 배웠어요. 우리나라(스리랑카)도 발전되면 이런 거 필요할 거예요. 일하고 돈 받는 거보다 기술 배우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요.”

■ 원인

변호인단은 재판에서 디무두의 실화 혐의에 무죄를 주장하기로 했다. 풍등을 날린 행위와 저유소가 폭발한 결과 사이에 수많은 인과관계의 단절이 있기 때문이었다. 풍등을 날린 게 저유탱크 폭발의 유일한 원인 행위가 아니기에 디무두가 저유소 폭발에 대한 형사책임까지 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저유탱크가 폭발하는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행위가 있었다. 최초로 초등학교 행사에서 풍등을 사서 날린 행위, 떨어진 풍등을 주어 날린 행위, 유류 저장탱크 주변을 마른 잔디로 마감한 행위, 저장탱크 주변 상황을 감독하지 않은 행위, 화재발생 후 상당 시간 동안 방치한 행위, 화염 방지 장치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행위 등등. 풍등을 날린 행위 하나로 저유탱크 폭발에 대한 형사책임을 져야 하는 건 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디무두와 동료 키산은 경찰 조사에서 “저유소의 존재를 몰랐다”고 주장하면서 “기름을 저장한 곳이라기엔 너무 허술해 보였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에서는 그런 시설(저유소)은 군인이 지키고 있거든요. 군인들이 3겹으로 지키고 있어요.” 공사 현장에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곳이고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위험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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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어 통역자도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긴 마찬가지다. “(스리랑카에선) 기름탱크로 가는 라인이 3개 있는데 이를 3중으로 차단합니다. 1㎞ 전부터 출입을 통제하고요. 스리랑카에서는 안전한 장소인데, 한국에서는 관리에 조금 문제가 있었던 거 아닌가 싶습니다. 18분 동안 불이 났고, 6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불이 난 것을 몰랐다는 것도 그렇고요.”

변호인단은 풍등은 누구나 손쉽게 구입해 날릴 수 있으며, 원하는 장소로 날린 뒤 회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거나 제작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 또한 소원을 담아 가능한 한 높고 멀리 날려보내도록 제작된 물건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풍등을 날린 사람에게 과실의 책임을 묻는 것은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세웠다. 반면 저유탱크를 관리하는 대한송유관공사의 의무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외부의 어떠한 발화 원인도 접근하지 못 하도록 하고 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더욱 무겁다는 것이다.

화재 발생 전인 9월17일부터 사흘 동안 저유탱크 옆 잔디밭의 제초작업이 있었다. 예초기로 짧게 잘라낸 풀은 송풍기를 이용해 주변으로 날려버렸다. 결국 잘려나간 잡초는 누렇게 말라 건초가 돼 잔디밭 곳곳에 쌓여있었다. 이 건초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대한송유관공사의 안전 부문 관계자는 “건초에 불이 붙으면 불이 나겠지만 탱크에 불이 옮겨붙어 폭발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고 했다. 저유탱크 환기구에 설치해 외부의 불길을 막는 인화방지망은 2014년 6월15일에 설치한 이래 수리나 교체가 없었다. 화염을 막지 못하는 찢어진 인화방지망도 발견됐다. 잔디에 불이 붙었을 당시에는 다른 탱크의 기름을 옮기는 작업 중이어서 아무도 CCTV를 살피지 못했다.

경기북부경찰청이 구성한 자문단이 확인한 대만의 연구사례에 따르면, 40년간 전 세계에서 벌어진 242건의 탱크 폭발사고 원인을 추적해보니 번개가 33%, 관리부실이 30%를 차지했다. 흡연 등 외부요인은 단 4건(1.6%)이었다. 풍등이 떨어져 폭발한 고양저유소의 폭발사고는 “이례적으로 특이한 사례”였다.

경찰 자문단은 저유소 관리 문제를 지적했다. 화재 위험성이 큰 주변 환경, 탱크 주변에 외부 화재를 자동인식하는 장치 부재, 환기구의 화염방지기 설비 미비, 탱크 내부 온도가 상승할 경우 경보점멸등만 작동하는 부실한 설비, 담당자가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지 않으면 화재를 인식하기 어려운 여건, 외부침입에 취약한 보안 등 풍등을 날린 행위가 저유탱크 폭발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을 막지 못하는 오류가 곳곳에서 여지없이 확인됐다.

■ 재판

지난 8월14일 법정에 선 디무두는 하얀 셔츠에 은빛이 감도는 재킷을 입은 말끔한 차림이었다. 스리랑카에선 법원에 갈 때 정장을 입고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평소엔 곧잘 수염도 길렀지만 아침에 깨끗이 면도했다. 사건 이후 디무두를 살뜰히 챙기던 금풍 본사의 조정현 부장은 디무두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대사관에서 온 직원인 줄 알았다”며 농담을 건넸다.

이날은 실화죄로 기소된 디무두의 첫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재판정 앞에 서자 디무두의 표정이 금세 굳었다. 재판 전 조영관 변호사(법무법인 덕수)와 이경재 변호사는 디무두에게 차분히 설명을 했다. “‘실화죄’는 실수로 불을 낸 범죄라는 뜻인데,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할 거예요.” 디무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이 시작되자 판사는 ‘통역이 없는데 괜찮냐’고 물었다. “이번 재판은 짧으니 다음엔 통역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조영관 변호사가 대답했다. “할 게 많습니까.” “예.” “무죄 다투나요?” “예. 증거 관계랑….” “무죄를 다툰다고요? 양형이 아니라요?” 판사는 고개를 저었다.

디무두의 변호인단은 풍등에 의해 잔디밭에 불이 붙은 것을 인정하더라도 실화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검찰이 디무두를 실화 혐의로 기소하며 적용한 형법 170조1항(실화)과 166조1항(일반건조물등에의방화)은 ‘건조물, 기차, 전차, 자동차, 선박, 항공기 또는 광갱’을 불에 태웠을 때 처벌하는 것이지 ‘잔디밭’은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재판 이후 세 달 가까이 흘렀다. 풍등을 날린 행위에 실화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를 놓고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디무두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지난 13일 지하철 3호선 화정역 인근에서 다시 만난 디무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국정지 조치가 내려졌다는 걸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디무두의 비전문취업비자(E9)는 이미 한 차례 연장해 내년 3월이면 만료된다. 한국에서 계속 일하려면 스리랑카에 돌아가 새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형사사건의 피의자로 입건되는 바람에 이제 디무두는 고향에 갈 수도,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계속 일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 재판이 더 길어지기 전에 4년 전에 떠나온 고향을 다녀올까 생각도 했지만, 계획은 물거품 됐다. 오는 12월18일 오후에 3차 공판이 열린다. 선고까진 얼마나 걸릴 지 가늠하기 힘들다. 저유소 폭발에 대한 실화 혐의가 무죄로 나오더라도 대한송유관공사의 민사소송이 이뤄질 가능성도 크다.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디무두 어쩔 수 없잖아. 재판이 잘되도록 하면서 힘내보자.” 조 부장이 디무두의 어깨를 두드렸다. 충혈된 눈으로 미소짓던 디무두는 “먼저 갈게요”하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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