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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냉전 종식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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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국현호입니다.

남북의 창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전주리입니다.

오늘 준비한 주요 소식부터 보시겠습니다.

30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굳고 높게만 보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열망이 컸고,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는 점에서 현재 한반도 상황과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의견들도 많습니다.

남북의 창에서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베를린 장벽 붕괴를 집중 짚어봅니다.

먼저 베를린 장벽이 어떤 과정을 통해 무너졌고, 또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지 정은지 리포터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87년, 베를린을 방문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소련에 동서독 통일을 촉구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당시 미국 대통령/1987년 : "고르바초프 서기장, 당신이 평화를 바란다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바란다면 또 자유화를 바란다면 이 장벽 앞으로 오세요.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장벽을 허무세요."]

연설의 내용은 2년 뒤 실현됐습니다.

1989년 11월, 동서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겁니다.

20세기의 기적, 독일 통일은 사실 사소한 말실수에서 비롯됐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당시 동독 정부의 대변인이었던 귄터 샤보브스키는 새 법안의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채 기자회견 자리에서 동독 주민의 서독 여행 규제 완화를 즉각적인 여행 자유화로 잘못 설명했습니다.

[귄터 샤보브스키/당시 동독 공산당 대변인/1989년 : "개인들의 해외여행은 복잡한 서류를 제출하지 않아도 신청이 가능하게 됩니다. 신청을 하면 바로 허가가 내려질 것입니다. (언제부터 시작되나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즉시, 지체 없이 시행될 겁니다."]

[한스 모드로/동독 마지막 총리 : "샤보브스키는 쪽지를 다시 꺼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적혀 있는 대로, 지금, 지체 없이” 여기에서 특별한 문제가 시작이 됩니다. 정치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세계적인 사건이 우연으로 시작되는 경우입니다."]

때마침 기자회견은 TV로 생중계되고 있었고, 수만 명의 동독 주민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장벽 붕괴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45년 분단 세월을 뛰어넘어 마침내 하나가 됐습니다.

베를린을 동서로 가른 철의 장막,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어느덧 30년이 됐습니다.

베를린 시민들은 자유를 억압했던 장벽에 올라 환호했고,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통일까지 달성했는데요.

‘이념의 시대’ 마감을 상징했던 세계사적 대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요?

1961년,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40km의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진 후 공산당 치하 동독 주민들은 통제와 감시 아래 놓였습니다.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향하는 목숨 건 탈출이 잇따랐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 감금됐습니다.

1989년 7만 명의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나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행진을 벌였고, 이 불길은 동독 전역으로 이어졌습니다.

[김누리/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사실은 독일 통일을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 데모예요. 이 데모를 통해서 동독의 스탈린주의자 동독의 독재자 에리히 호네커라는 인물을 끌어내렸고 그럼으로써 민주적인 권리의 동독 주민들이 쟁취한 거예요. 독재자를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권리를 쟁취했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죠? 혁명이죠. 혁명. 그래서 10월 9일 일반적으로 동독 혁명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동독 시민들의 개혁 요구는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켰고, 이듬해 3월, 동독 내 첫 자유선거로 이어졌습니다.

[동독시민 : "사민당에 투표했습니다. 사민당이 서독과 통일 문제를 가장 적절히 협의할 것입니다."]

동독 첫 자유선거인 인민회의 선거에선 조속한 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운 기민당이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한 사민당을 꺾고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독일 통일에는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개혁 정책, 동구권 공산 국가들의 붕괴, 동독의 경제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결국 자유를 원하는 동독 주민들의 힘이 결정적이었다는 해석이 그래서 나옵니다.

[김누리/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기독교민주당은 빠른 통일을 사회민주당은 점진적인 통일을 그다음에 동독 혁명을 주도했던 동독 시민들은 통일에 반대했어요. 그들은 통일이 아니라 서독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으로서의 진정한 자유롭고 사회주의적인 국가로서의 동독을 재건할 것을 내세웠어요. 이렇게 세 정당이 세 개의 다른 통일 프로젝트를 선거에 가장 중요한 강령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1990년 3월 선거는 그야말로 통일 선거였던 거죠. 거기서 동독 주민들이 빠른 통일을 택한 거예요."]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동독 주민들의 열망이었지만, 구체적 실현은 서독 정부의 몫이었습니다.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선거 기간에는 동방정책을 반대했지만, 취임 후에는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헬무트 콜/당시 독일 총리/1989년 : "역사적 순간이 허용한다면, 제 목표는 한결같이 우리 독일의 통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강대국에 의해 동서로 분할된 독일은, 승전 4개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동의가 있어야만 통일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독일의 통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안톤 숄츠/독일 기자 : "왜냐하면, 1차 대전도 독일부터 시작했고 2차 대전도 우리나라부터 시작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 유럽사람들 겁이 많이 있었어요. 만약에 독일 갑자기 다시 이렇게 커지면 갑자기 다시 이렇게 강화가 생기면 어떻게 혹시 독일 다시 세차 대전 시작할 건지."]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콜 총리는 통일 독일에 대한 전승국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부시 대통령과 긴밀히 협의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독일 통일에 반대하는 전승국들의 이견을 조율했고,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담판을 통해 통일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안톤 숄츠/독일 기자 : "독일이 운이 좋았던 게 그때는 미국에 부시 대통령 있었고 그 사람 조금 보수적인 스타일이지만 그런데 문제는 그냥 통
일 반대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고르바초프 있었어요. 고르바초프도 자기 나라 바꾸는 중이었어요. 그래서 오케이, 얼마나 빨라도 지금 그냥 이 기회가 있었으니까 지금 꽉 잡아야 돼. 지금 안 하면 이거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이거는 우리 역사에서 제일 큰 행운이었어요."]

서독은 경제적 파국 상태에 놓여있던 소련에 대규모 경제지원과 양국 간 협력 사업을 제안하며 양해를 끌어냈습니다.

이는 고르바초프가 국가 존속을 위해 추진하던 개혁개방 움직임과도 맞물렸습니다.

결국, 1990년 9월에 개최된 2+4회담에서 동서독과 4개 전승국이 모여 통일 독일에 최종 합의했고, 마침내 국제 사회의 동의 아래 온전한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독일 통일 과정은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제 문제로 규정됐다는 점에서 지금의 한반도 상황과도 비슷합니다.

분단 상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지나칠 수 없는 건 주민들의 강력한 열망과 함께 지배 엘리트의 확고한 의지, 그리고 주변 환경이라는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는 점인 데요.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진행 중인 한반도에서 독일의 경험은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을까요?

미국 대북 담당 차관보가 북한 문제에 대한 공개 발언에 나섰습니다.

[알렉스 웡/미국 국무부 북한 담당 차관보/11월 5일 : "평화 체제는 한반도에서 70년간 이어져 온 전쟁 상태가 영구적이어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5일 실무협상 결렬 이후 북미 대화가 교착인 가운데 북한에 체제 안전보장을 거듭 제시하며 대화 재개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비핵화 협상 전면에 나선 미국과 북한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하는 중국. 이처럼 한반도 문제는 주변국들의 이해가 얽혀있는 만큼, 주변 강대국들 설득에 적극적이었던 서독 정부의 노력을 참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호르스트 텔칙/전 독일 외교안보보좌관 : "먼저 남한과 북한 양국 간의 합의와 국제적인 관계,, 즉 6자회담에 참여하는 국가들과의 관계 역시 고려되어야 합니다. 특히 한미관계, 한중 관계, 한일 관계, 그리고 한러 관계가 중요합니다. 가능한 이 국가들과 우호적이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에, 독일과 한반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분단 과정부터 달랐던 만큼 다른 방식의 접근 역시 중요하다는 지적입니다.

[김누리/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우리는 지금 종속국가도 아니고 식민지도 아니에요. 패전국도 아니에요. 당당한 주권국가로서 한반도의 운명을 우리가 깨치고 나가는 것이지 누가 우리 이 운명을 대신해줘요? 그래서 새로운 한반도의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첫번째 요구되는 것이 바로 남한 정부의 새로운 자각이에요."]

동서독이 통일을 먼저 결정하고 전승국의 신속한 동의를 얻어냈던 것처럼 남북 간에도 통일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양무진/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의 문제이면서 국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남북 당사자 간의 대화와 교류협력 신뢰가 기본입니다. 이 기본이 돼 있어야만이 주변 국가로부터 지지와 협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장벽이 삽시간에 붕괴된 지 30년,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은 냉전을 딛고 통합을 이뤄낸 힘이었습니다.

비핵화와 평화를 둘러싸고 냉전의 유산이 여전히 남아있는 한반도에서 독일의 경험은 아직도 살아있는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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